출산과 함께찾아온 불청객
갯새암 <<내 어머니의 샘>>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갑상선 기능 항진증이 온 적이 있었다. 살이 15㎏이나 빠져서 뼈만 앙상히 남고 눈은 툭 튀어나오고 목도 부어, 에티오피아 난민 같아 보이던 때가 있었다. 갑상선 기능 항진증 진단을 받고 약을 복용한 지 몇 달이 지났을 때 서울대학교에서 역학조사 차 내려오신 갑상선 전문의 김○○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나를 보신 교수님은 폐에 물이 차 있고, 3개월 정도밖에 살지 못할 수 있다며 당장 서울 원자력병원에 입원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돌도 안 지난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이 서울로 올라갔다. 아이를 어디에 맡길 상황이 아니어서 같이 올라갔는데, 일반 병실에서는 아이와 같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1인실을 원했지만 병실이 없어 남편과 아이는 주변 여관에서 지내야 할 형편이었다. 돌도 안 된 아이가 엄마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아 나도 울고 아이도 울고 막막한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원무과에서 연락이 왔다. 원래 일반인에게는 잘 주지 않는 특별실이 하나 있는데 교수님의 배려로 특별히 배정한다고 했다.
대신 병실료가 아주 비싼데 어떻게 할 건지 물어 왔다. 그때 남편이 받던 월급을 생각하면 부담이 컸지만 밖에서 여관비 내며 밥 사 먹고 왔다 갔다 해야 할 상황을 생각할 때 무조건 감사하다며 달라고 했다. 큰 침대가 두 개나 있고 응접실이 따로 있는 VIP룸이었다. 온 가족이 같이 있을 수 있어 우린 그냥 휴가 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웬만한 호텔보다 나은 병실에 진료 차 들어오신 박사님은 우리를 보고, 온 가족이 소풍 온 것 같다며 웃으셨다. 병원에 있는 열흘 동안 각종 검사와 몇 가지 치료를 하긴 했지만 그 나머지 시간은 우리 가족에겐 모처럼의 휴가와도 같았다. 넓은 병실에서 아이와 함께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떨어져서 우리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사실 갑상선 기능 항진증이 오기까지 환경 안에 많은 스트레스가 있었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에서 원치 않게 엄청난 압박과 힘든 시간을 보냈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노출된 상황에서 아이를 갖게 되었다. 심한 입덧으로 거의 먹지 못하였고 전치태반으로 아주 위험한 상태라 임신 기간 내내 불안하고 초조했다. 겨우 8개월을 넘기자마자 하혈을 해서 바로 입원을 해야 했다. 의사는 골반이 너무 좁아 자연분만은 힘들다고 했다. 금식하고 수술을 기다리다가 진통이 와서 결국 실컷 고생하고 자연 분만했다. 같이 들어온 산모들이 다 나가고 새로운 산모들이 들어올 무렵까지 분만대기실에 홀로 남았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키만 크고 홀쭉한 아이를 보자마자 “다시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요.” 하고는 기절해서 의사와 간호사들을 놀라게 했다.
아이를 낳고 3일간 병원에 있을 때는 그래도 제일 호강한 시간이었다. 광안리 세강 병원에서 분만했는데 결혼 전 살던 곳이라 근처에 같이 교회 생활하던 성도들이 아이를 낳기까지 밤새 분만실 밖에서 기도하며 대기해 주셨다. 아이를 낳은 후에는 병원 밥을 거의 먹지 않을 정도로 매일 미역국과 맛있는 반찬을 해 오시고 돌아가며 병실을 지켜 주셨다. 그때 받은 성도들의 사랑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그 지극 정성을 뒤로하고 퇴원해서 서생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만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 원자력 발전소에 근무하는 남편을 따라 바닷가의 한적한 시골마을로 온 우리는 사택이 바로 나오지 않아 그 마을 면장님 댁에서 세를 살았는데, 수압이 낮아 세탁기를 쓸 수 없었다. 시어머니께서 첫 아이는 꼭 면 기저귀를 써야 한다고 직접 만들어 보내셔서 매일 기저귀 수십 개를 손빨래하고 삶아서 널어야 했고, 몸조리를 도와줄 사람이 없어 혼자 아이를 돌보며 어쩔 줄 몰라 쩔쩔맸다. 친정엄마가 오셔서 3일간 계시다가 바쁜 추수철이라 다시 가시고 그 후에는, 정말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했다.
남편은 회사일이 바빠 매일 늦게 돌아오고 갓난아기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몰라 동동거리며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했다. 모유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우유를 먹였는데 밤에 아이가 서너 번씩 깨어 우유를 먹이고 트림이 나올 때까지 안고 있다가 날이 새기를 반복하며 난 몸과 마음이 지쳐 갔다. 새벽 동이 트기 무섭게 경운기 소리와 함께 시끌벅적해지지만, 해가 지면 금세 고양이 울음소리 외엔 적막한 시골 동네에서 아기가 울음을 그치지 않을 땐 혼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나도 함께 울었다.
나중에 내 또래 새댁들의 얘기를 들어 보니 다들 산후조리를 한 달씩 하고 미역국도 한 달 가까이 먹었다고 했다. 난 미역국도 거의 안 먹고 찬물에 손을 담그며 매일 빨래를 하다 보니 어느 날부터 손에 인대에 문제가 생겨 무거운 것도 들 수 없고 빨래를 짤 때도 너무 아파 몹시 고통스러웠다. 손에 힘이 없어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할 때에도 실수가 많아 무척 예민해지고 신경이 쓰였다.
살이 자꾸 빠지고 몸이 너무 힘들어 엄마에게 며칠만 아이를 봐 달라고 부탁드렸다. 엄마가 오셔서 나를 보시더니 내 목이 너무 부었다며 혹시 갑상선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병원에 가 보라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그런 병이 있는 줄도 몰랐기에 엄마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자꾸 신경이 예민해지고 손이 떨리며 목도 점점 부어올라 갑상선에 대한 병의 증세를 찾아보니 갑상선 기능 항진증과 너무 일치했다.
그즈음 드디어 회사 사택이 나와서 발전소 가까이에 위치한 아파트로 들어가게 되었다. 사택에 오니 가장 좋은 것은 세탁기를 쓸 수 있고, 이웃이 많아 급할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밤늦게 와도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있으니 훨씬 덜 무서웠다. 사택에 들어와서 조금 안정된 후에 병원을 찾았다. 엄마 말대로 갑상선에 문제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읍내 내과에 가서 검사를 하니 수치가 너무 높다고 부산대학교 근처에 갑상선만 전문으로 보는 유명한 병원을 소개해 주셨다. 그때만 해도 예약이라는 것이 통하지 않던 시절이어서, 진료를 받으려면 전날 밤부터 돗자리를 깔고 병원 앞에서 기다리다가 새벽 4시부터 나눠 주는 진료 순번표를 받아야 했다. 그것도 사람이 너무 많으면 다음 날 다시 가서 줄을 서야 했는데, 아이를 데리고 새벽 4시에는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우리가 살던 원자력 사택에서 그곳까지 가려면 기차를 타고 부산역에 가서 또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해서 진료받기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 부산대학교 병원 근처에 사시던 신상훈 형제님 가정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다. 대학병원에서 근무하시던 형제님은 정말 바쁘신 가운데도 내가 진료를 받으러 가는 날엔 새벽부터 대신 가셔서 순번표를 받아 오전 중에 진료를 받게 해 주셨다. 점심때는 자매님과 함께 남포동의 맛집에서 맛있는 밥까지 사 주셔서 그때 받은 그 사랑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후로도 몇 번, 형제님 가정은 내가 병원에 갈 때마다 대신 순번표를 받아 주시고 진료가 다 끝날 때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 주셨다.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며 처음엔 2주에 한 번씩, 나중엔 한 달에 한 번씩 오라고 하셨다. 약을 먹기 시작한 지 6개월이 될 무렵, 서울대학교에서 역학조사 차 김○○ 교수님께서 의료진들을 인솔해서 우리 마을에 오셨다. 변변한 병원 하나 없는 시골마을이라, 서울에서 의료진들이 내려와 무료 진료 상담을 한다기에 나도 찾아갔다. 갑상선 약을 복용하면서 소화도 너무 안 되고 온종일 머리가 멍했는데, 원래 진료받던 의사 선생님께는 오로지 약을 열심히 먹으라는 말밖에는 들을 수 없어 너무 답답했다. 약을 먹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하셔서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나와 상담을 하던 젊은 의사는 내 눈과 불룩 튀어나온 목을 보더니 지병이 있느냐고 물었다. 난 갑상선 기능 항진증이라고 말하고 약을 먹고는 있지만, 몸이 너무 힘들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젊은 의사는 잠시 상담을 멈추고 인솔자이신 김 교수님을 모셔 왔다. 교수님은 내 건강 상태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진료를 본 후에 바로 서울 원자력병원에 입원하라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상태가 너무 심각해 폐에 물이 차고 있으며, 시기를 놓치면 3개월 정도밖에 못 산다고 하셨다. 하긴 몸무게가 34㎏밖에 안 나가 뼈만 앙상했고, 눈은 툭 튀어나오고 목이 부어 내가 보기에도 너무 심각한 모습이었다. 어쨌거나 병에 대한 상담이나 받아 보려고 간 내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여서 이틀 뒤, 남편이 휴가를 내서 온 가족이 서울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