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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희 Apr 06. 2021

웰빙의 바람을 타고 온 현미채식

갯새암<<내어머니의  샘>>


        

몇 년이 지난 후 웰빙의 바람이 불어오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올바른 먹거리와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있었다. 그즈음 나도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다시 학교에 가고 유학도 다녀오며, 스트레스와 피로 때문에 조금씩 건강이 나빠져 가고 있었다. 음악 공부를 하면서 더 이상 사람들에게 수지침을 놓아 주지는 못했다. 가끔 내가 아플 때나 가족이 아픈 경우 해외에 나갈 때를 제외하곤 수지침을 더 이상 잡을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때마침 불어온 웰빙의 바람을 타고 내 관심도 다시 먹거리로 돌려지고 있었다. 10년 동안 유지해 오던 45㎏의 몸무게가 스트레스와 과로, 불규칙한 식사로 인해 50㎏까지 육박해 있어서 현미채식으로 체중을 잡아 보기로 했다 TV에선 현미채식으로 다이어트에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가 빈번히 방송됐다. 나 또한 현미채식의 효능을 알기 위해 도서관과 서점을 들락거렸다. 대구 시립병원의 한 의사 선생님이 약을 처방하지 않고 현미, 야채, 과일만 먹는 식사법으로 고혈압과 당뇨 비만을 치료한 영상을 보고 나도 해 볼 용기가 생겼다.


 때마침 재림이도 유학을 가고 남편도 다른 지방에 전근을 가 있어서 바로 현미식을 시작할 수 있었다. 원래 야채와 과일을 좋아하는지라 까끌까끌한 현미밥을 먹는 걸 제외하곤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고기, 생선, 계란, 우유를 완전히 끊고 현미채식을 시작하자 처음 두 달은 확실히 살이 조금 빠졌다. 그리고 몸이 많이 가벼워지면서 아침에 일찍 눈이 떠지곤 했다.  

         

현미의 매력에 푹 빠져 현미채식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친정엄마가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뇌로 올라가는 두 개의 큰 혈관 중에 한쪽이 거의 막혔고 다른 쪽도 막힐 수 있어 수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게다가 워낙 위험한 부위라 수술 도중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했다. 또 혈당이 너무 높아 이걸 먼저 잡아야 수술이 가능하다고 해서 온 가족이 비상에 걸렸다. 나는 엄마를 살리기 위해서는 현미채식을 꼭 드시게 해야 한다고 가족들을 설득했다. 병원 식사를 사식으로 바꾸고. 막내가 매일 현미밥과 야채 반찬을 만들어 병원에 가져왔다.

          

엄마는 지독히도 현미밥을 싫어하셨지만 딸들이 하도 지극정성으로 만들어 오니 억지로 드셨다. 그러면서도 매번 쌀밥에 칼칼한 쌈장과 상추쌈을 먹으면 좋겠다고 푸념하셨다. 천만다행으로 혈당이 잡혔고, 엄마는 딸들의 간절한 바람과 기도에 응답하듯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병원에선 엄마를 보고 복 받은 할머니라고 불렀다. 그 큰 병원이 우리 육자매가 뜨면 시끌벅적했다.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엄마가 조금만 불편해하시면 난리법석을 떨어 시끄러운 가족이라고 소문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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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무사히 퇴원하자 우리는 이 모든 공을, 막내가 열흘 동안 열심히 해 다 드린 현미밥에 돌렸다. 하지만 엄마는 여주 삶은 물을 먹어서 효과가 좋았다고 우겨 대셨다. 우린 현미쌀을 사다 드리며 엄마에게 꼭 현미밥을 해 드실 것을 신신당부했다. 한동안 지난 후 언니가 전화가 와서 엄마가 현미밥 대신 보리밥을 해 드신다며 푸념했다. 엄마에게 전화해서 왜 현미밥을 안 드시냐고 했더니 까끌까끌해서 도저히 못 먹겠다며 엄마는 보리밥이 좋으니 이걸 드시겠다고 했다. 억지로 드시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니 속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는 스스로 자기 몸이 필요한 음식을 찾아서 잘 드시고 있는 거였다. 보리밥에 마당에서 키운 상추와 신선한 야채들 직접 담근 된장으로 된장찌개를 끓여 드셨다. 텃밭엔 고구마를 심어 삶아 드시며 늘 몸을 움직이셨으니 열이 많은 엄마의 체질에 그 어떤 의사의 처방보다 좋은 섭생 방법을 본능적으로 찾아 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런 엄마를 모시고 현미 자연 채식을 하는 생활 교육원까지 갔으니 지금 생각하면 엄마에게 너무 죄송하다. 그때는 엄마가 우리 부탁을 듣지 않고 현미밥을 안 드셔서 정말 속상했지만 오히려 고집을 부리신 일이 돌이켜 보면 엄마에겐 참 다행이었다.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현미가 가지고 있는 식품 효능만 믿고 현미채식을 강요했다. 

         

현미에 들어 있는 영양소와 효능을 볼 때 현미는 완전식품에 가깝다. 또한 현미식을 강조하는 의사들과 자연 채식을 연구하는 분들의 말도 상당이 일리가 있다 이분들은 사실 연료로 말하면 최상의 연료를 사람들에게 소개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한 건 이 최상의 연료를 잘못 적용한 것에 있었다. 사람마다 각자 받아들일 수 있는 음식이 다른데 그걸 구분하지 않고 식품이 가지고 있는 효능만 보고 일률적으로 공급한 것이다.   

       

차로 예를 들면, 이 차가 휘발유를 넣어야 하는지 경유를 넣어야 하는지는 차가 만들어지면서부터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휘발유라도 그것을 경유를 연료로 사용하는 차에 넣으면 반드시 문제가 터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휘발유를 넣어야 할 차에 경유를 넣어도 마찬가지인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웰빙을 외치며 최상의 먹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아무리 최상의 식품이어도 내게 맞지 않는 음식을 먹으면 아무런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결국 질병에 걸릴 수밖에 없다. 내 몸이 태어날 때부터 열이 많은 체질이라면 찬 성질의 음식을 먹어 밸런스를 맞추어 줘야 하고 반대로 항상 몸이 냉하고 찬 사람이라면 따뜻한 열성의 식품을 먹어 음양의 밸런스를 맞추어 주어야 한다. 내 몸이 뜨거운데 뜨거운 성질의 음식이 들어오면 내 몸은 반발하고 밀어낼 수밖에 없고, 내 몸이 찬데 차가운 성질의 음식이 들어와 내 몸을 더욱 차갑게 하면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어떤 음식을 먹었을 때 소화가 잘 되지 않거나 몸이 가렵다거나 생목이 오르는 경우를 누구나 한 번쯤 겪어 보았을 것이다. 다행히 같은 음식을 연달아 먹지 않아 그 증상이 금방 해소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어떤 이는 지속적으로 맞지 않는 음식을 먹어 늘 소화불량과 만성 두통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우리 몸이 보내는 신호에 조금만 귀 기울여 보면 우리가 겪는 상당 부분의 질병이 잘못된 식습관으로 인해 왔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엄마가 뇌경색이 오기 전 난 당뇨가 있는 엄마를 위해 몇 년간 홍삼을 달여서 드시게 했다. 기력이 부족한 엄마에게는 홍삼이 좋다고 해서 몇 년 동안 사 드렸다. 그리고 동생들은 혈압에 좋다고 하는 양파즙을 몇 번이나 엄마에게 보내 드려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곤 했다. 홍삼이나 양파즙의 효능만 생각하면 더없이 좋은 효도 선물이지만, 열이 많은 엄마의 체질에는 맞지 않는 식품들을 몇 년씩 공급해 드린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주일 아침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고 있는데 언니에게서 문자가 왔다. 지난번 막혔던 같은 자리에 또 혈전이 생겨서 엄마가 쓰러지셨는데, 병원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아노 반주 중이라 울 수도 없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할 수 없어 어찌할 줄 몰랐다. 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와서 침대에 앉아 소리 죽여 울었다. 병원으로 달려가야 하는데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난 무릎을 꿇고 제발 엄마가 깨어나셔서 마지막 시간을 우리와 함께 보내고 삶을 정리하실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우리 엄마의 정신력은 정말 강하셨다. 중환자실에서 3일간의 금식과 약물 치료로 기적적으로 소생하신 것이다. 깨어나도 언어장애나 치매가 올 수 있다고 했는데 엄마는 다리만 좀 불편하실 뿐 다른 후유증은 없으셨다. 그리고 상태도 많이 호전되어서 수술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의사 선생님들은 엄마가 정말 대단하다고 하셨다. 다리가 좀 불편해 며칠간 물리치료를 받은 엄마를 모시고 우린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시 집으로 왔다. 엄마는 병원에 계신 것이 많이 갑갑하셨는지 시골집에 오시자 너무 좋아하셨다. 


동네 사람들은 엄마가 다시 걸어서 집으로 오시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린 엄마가 깨어나서 정말 기뻤지만 혼자 계신 엄마가 또 아프면 어떻게 할지 많이 걱정이 되었다. 재활병원에서 좀 더 계시면서 충분한 치료를 받게 하고 싶었으나 엄마는 병원에 있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다리가 불편한 엄마를 혼자 시골집에 계시게 하고 부산으로 내려오는 길…


마음이 너무 무겁고 힘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부산에 모셔오고 싶은데 절대 시골집을 떠나려 하시지 않아, 우리는 교대로 순번을 짜서 엄마에게 가기로 했다. 당분간은 다 같이 모여 마당에 숯불을 피워 놓고 고기를 구워 먹으며 시끌벅적 떠드는 일은 없겠지…. 

장미 울타리가 예쁜 시골집에 제비들만 날아다니며 엄마 곁을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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