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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브 Aug 12. 2024

초록색 병

내 불안장애의 한 가지 원인

몇년 전, 엄마가 아팠다. 

‘엄마가 죽으면 어떡하지?’도 아니고 

‘죽을수도 있겠다’도 아니고

‘이번엔 엄마가 정말 죽겠다.’고 생각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을 정도로 많이 아팠다.



엄마는 이제껏 술을 많이 마셨다. 

알콜 중독이었기 때문에 

단 하루도 술을 안 마신 날이 없었다. 

저렇게 마시다가 언젠간 엄마의 간이 

견디지 못 할 거라고 생각 할 정도로 마셨고 

결국 간이 견디지 못했다.


엄마도 놀랐는지 잠시 안 마시는 듯 했으나, 

곧 또 다시 마시기 시작했고 

이번엔 정말 죽을 것 같은 사람의 몰골이었다.


17살의 기억이 처음이다.

그 때부터 집에는 항상 초록색 병이 있었다. 

그리고 난 그 초록 병이 끔찍하게 싫었다.

그게 참이슬인지 처음처럼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밖에 가지고 나가 모조리 깨트려버리고 싶었다.

초록색 병이 집에 자리하기 시작하면서 

주말부부인 부모님은 서로 죽일 듯이 싸우기 시작했다.

주말에 아빠가 집에 오고 엄마가 술을 마시는 날은 

두려움에 벌벌 떨며 귀를 막고 있어야 했다.


주말은 부모님이 싸우는 날이라는 생각이 들고 나서는 

엄마 아빠가 싸워도 태연하게 티비를 볼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처음 부부싸움의 원인은 항상 아빠였다. 

바람을 진짜 피운건지 엄마가 의심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제는 늘 아빠의 외도였다.

아빠의 외도는 내가 아주 어릴 적,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나는 기억이니 

엄마가 혼자 감당했던 시간은 그 때도 이미 한참 된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부부싸움의 원인이 엄마가 됐다. 

엄마도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아빠가 알게 됐기 때문이다.

아주 늦은 어느 날 밤. 

엄마 아빠가 싸우는 소리를 들으며 잠든 척을 하고 있었다. 

그 날은 평소보다도 훨씬 더 심한 싸움 같았다.

아빠는 엄마의 그 사람과 외가 식구들을 집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베란다로 가서 칼을 갈았다. 

실제로, 칼을 갈았다. 

얼마 뒤 작은 삼촌이 가장 먼저 도착했고 

삼촌은 엄마를 때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맞는 소리가 귀에 세네번 들렸을 땐, 

더 이상 잠든 척을 할 수 없었고 나는 소리를 질렀다.


내 방문을 열고 들어 온 삼촌은 나와 남동생을 

외할머니에게 맡겨 할머니 집으로 가게 했고, 

그 후에 우리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 날 이후, 아빠는 엄마를 때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언성을 높이며 죽일 듯이 소리치는 싸움이 아니라 

폭력이 가해지는 싸움이었고

엄마가 하루의 잠깐이 아닌, 

모든 시간을 술로 보내기 시작한 것도 이쯤이었다. 


그리고 우리 집은 갈수록 더 작은 곳으로 이사를 다니기 시작했고 

아빠는 주말에도 더 이상 집에 오지 않았다.

집의 크기는 갈수록 작아지는데 

우리 집에 초록색 병은 늘어가기만 했다.


우리 집에 초록색 병이 늘어갈 때마다 

나를 향한 엄마의 폭언도 늘어갔다. 

왜 나였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술만 마시면 엄마는 내 존재에 대해 욕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무 기억도 못했다. 

밤새 엄마의 욕을 들어야 했던 나는,

 그 다음 날 아무 기억도 못하는 엄마에게 어떤 사과도 들을 수 없었다.


아빠가 싫은지는 한참 됐고, 엄마도 싫어지기 시작했다.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엄마는 의지가 약하고 못 배워서 무식하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불면증은 술을 먹기 위한 합리화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진작에 이혼을 했으면 내가 이 꼴을 보면서 크지는 않았을거라고 확신했다.



그 결과 나는 늘 슬펐다. 

우울하지 않은 감정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슬픈지 잘 몰랐다.

이 감정이 내게는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하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곧 나는 아팠다. 

아침에 학교를 가다가 버스를 타지 못해 

버스정류장에서 한참이나 숨을 골라야 했다.

주말에 출근을 하다가 몇 번이나 버스에서 내려야 했다.

수업을 들으러 가다가 심장이 빨리 뛰고 

얼굴이 새빨개져 응급실에 실려가야 했다.


잠을 못 잤다. 

아침이 오면 또 다시 내일이라는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그 불안함에 밤엔 잠을 설치고, 

맞닥뜨려야 하는 아침이오면 피하고 싶어서 잤다.


삶이 망가지기 시작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때 마침 일을 그만 둘 수 있는 핑계가 있어 그만 두게 됐다.



그 후로 나는 더 많이 아팠고 

결국 병원을 찾아가 마음에 좋다는 약을 먹어야 했다.



얼마 후 엄마도 아팠다. 

초록색 병이 결국 우리 안에 아픔을 느끼게 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한 것이다.

엄마처럼은 절대 살지 않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엄마의 삶을 무시했는데,

엄마가 아프자 평생을 어둠 속에 외롭게 살았던 엄마가,

이렇게 죽는다면 엄마의 삶이 너무 불쌍해서 내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제서야 나는 엄마의 삶과 마주하게 됐다.

결국 엄마의 삶의 한 부분을 닮아버린 나는 엄마를 이해했다.

우리 둘은 똑같은 초록색 병을 앓고 있던 것이다.



엄마의 불면증은 의지 없음이 아니었음을.

엄마의 알콜중독은 엄마의 선택이 아니었음을.

나에게 욕하던 그 모든 순간들도 엄마의 의도가 아니었음을.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이혼이 엄마의 삶 

모든 순간 중 가장 아픈 것이었기 때문에, 

자기 자식한테만큼은 그 아픔을 겪게 해주고 싶지 않았던 최선이었음을. 

우리 집에 쌓여가고 늘어가던 초록색 병은

엄마의 아픔이 쌓여가는 것이고, 

도와 달라는 또 다른 소리였음을.



내가 결혼을 준비 할 때, 

엄마는 아주 오랜만에 아빠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딸이 결혼하는데 아무것도 안 해줘서 보낼거냐고. 

나는 아무것도 안 해줘도 괜찮았다.

그걸 안 해준다고 원망할 생각도 없었다. 

착한 딸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아빠에게 시비거는 엄마가 그만 하길 바랬다.

결론적으로 결혼 할 때 아빠는 나에게 뭘 딱히 해준 것은 없다.


엄마는 내가 결혼 한 후에도 홈쇼핑에 건조기가 나올 때마다 나에게 전화했다. 

‘집에 건조기 하나 놔줄까?’

정말이지 작은 집에 놓을 자리가 없었서 거절했다.



뒤늦게 생각해보니, 

엄마는 평생 나에게 해 준 것이 없다고 생각했나보다.

결혼을 하고 한참이 지난 지금도 엄마의 마음 한 켠엔 

나에게 뭐라도 하나 해줘야겠다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주변에 친구들이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기르는 모습을 보니,

엄마는 내 평생 필요한 모든 것을 

내가 어릴 때 이미 다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아프게 했던 말들, 

청소년기에 겪었던 모든 상황들도 

그게 엄마에게 있어선 최선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지금 나는 그냥 엄마가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더 잘 해 줄 수 있는 시간을 줘서 고맙다.

어릴 적 나에게 해줬던 모든 것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도록 기회를 줘서 감사하다.


엄마와 나의 마음에는 초록색 병이 들어있다.

내가 지금 내 아픔과 슬픔들을 마주한 것처럼 

엄마도 자신의 아픔과 슬픔들과 마주했다.

그리고 우리는 마음에 들어버린

그 초록색 병들을 하나씩 하나씩 치료하기 시작했다.


곧 우리 집에는 초록색 병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우리 마음의 초록색 병이 완전히 치유 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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