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나무 불꽃’이 던지는 질문

한 불문학자의 『채식주의자』에 던지는 질문

by 글쓰는개미핥기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세 편(「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이루어진 연작소설이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따로 있을 때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합해지면 그중 어느 것도 아닌 다른 이야기 -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 - 가 담기는 장편소설이다.


따라서 작가의 말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채식주의자』의 의미를 구성하는 것은 다만 개별 중편의 내용뿐이지 않다. 세 편의 제목, 세 편의 배치, 세 편의 관점 - 그리고 독자가 그것들을 순차적으로 읽어나가게 되어있다는 점에서 - 그로부터 예상되는 독자의 경험 자체가, 의미의 구성에 참여하도록 되어 있으리라.

세 편의 이야기를 관통하고 있는 중심인물은 ‘영혜’다. 세 중편은 각각 영혜의 남편, 영혜의 형부, 영혜의 언니의 시선을 따르고 있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평범한 가정주부이던 영혜가, 어느 날 꾼 악몽을 계기로 육식을 거부하기 시작, 종내는 모든 종류의 식사를 거부하고 아사상태에 이른다’로 정리할 수 있다.

「나무 불꽃」에서 ‘내장 기관의 퇴화’를 바라는 영혜의 모습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듯이, 중요한 것은 ‘채식’ 자체가 아니라 ‘소화’에 대한 거부이다. 육식에 대한 거부와 식사에 대한 거부는 본질적으로는 소화에 대한 거부라는 공통점 아래 묶이는 것이고, 이에 ‘소화’란 어떤 행위인지에 대한 질문이 대두한다. 소화는 대상을 파괴함으로써 ‘나’가 양분을 얻는 과정이다. 영혜는 이를 폭력으로 인지한다. 그런데 대상에 대한 파괴 없이 양분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식물의 길이다. 광합성에는 햇빛과 물이 필요하지만, 그러한 필요가 태양과 바다를 파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영혜는 모든 폭력이 견딜 수 없이 역겹게 느껴지는 인물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점차 ‘나무’에 동일시하게 된다. 그러한 선택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각 편의 ‘시선’은 성격이 갈리게 된다.

「채식주의자」의 ‘정서방’은 방관자다. ‘꿈을 꿨다’는 이유로 돌연 육식을 거부하기 시작한 아내는 그에게는 그저 불가사의한 타자다. “순간,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그녀의 머릿속이, 그 내부가, 까마득히 깊은 함정처럼 느껴졌다.” 그는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다. 그에게 아내의 변모는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될 위협이다. 이는 사회적 규약에 충실한 사람의 시선, 곧 ‘정상’의 시선이다. 「몽고반점」의 예술가 형부는 착취자(搾取)다. 그는 서서히 ‘식물’이 되어가고 있는 영혜에게서, 즙을 쥐어짜(搾) 내고자 하며, 그의 목적은 그녀가 지닌 매력의 소유(取)이다. ‘새’와 동일시되는 이 중년 비디오 아티스트는, 소원대로 영혜의 모습을 필름에 담아내는 데 성공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파멸하게 되며, 그 모습은 「채식주의자」의 결말에서 날개를 물어뜯긴 동박새와도 같다. 그는 ‘나무 불꽃’에 잠재된 자학적 폭력성에 매료된 이의 시선을 대변한다. 「나무 불꽃」의 인혜는 영혜의 유일한 이해자다. 그러나 인혜는, 영혜를 이해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전남편과 마찬가지로 ‘나무 불꽃’이 옮겨 붙을 위기에 빠지게 된다. 인혜가 조용히 그 불꽃을 노려보며, 항의하는 것으로 본 작의 막이 내린다.

독자는 정서방, 형부, 인혜라는 세 인물에 차례대로 몰입하면서 점차 영혜라는 문제적 인물의 진실에 다가선다. 「채식주의자」는 ‘정상’의 시선이 그녀에게 요구했던 마지노선이다. 채식은 삶의 한 방식이 될 수 있으되, 채식주의자는 어디까지나 사람(者)이어야 했던 것이다. 「몽고반점」은 영혜가 지향하는 ‘나무’ 이미지가 가진 식물성의 상징이자 ‘형부’의 욕망의 대상이다. 페티시의 대상으로서 「몽고반점」은 따라서, 한편으로는 영혜의 인정받은 식물성이되, 다만 소유의 열망 아래 포착되고 있을 뿐 이해받고 있지는 못하다. 「나무 불꽃」은 온전히 스스로의 기도(企圖)에 충실해진 영혜의 정수(精髓)다. 불꽃은 타들어가는 대상을 소진시킴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으며, 인접한 대상으로 쉬이 옮겨 갈 수 있는 위험성을 띄고 있다. ‘나무 불꽃’은 비뚤어진 형태로 성취된 영혜의 첫 주체성이자 인혜의 치명적 위기이다.




「채식주의자」에서 이탤릭체로 강조된 영혜의 독백은, 채식의 직접적 계기가 된 ‘꿈’의 내용과 함께 그 ‘꿈’의 기원에 닿아있을 유년기의 기억을 언급하고 있다. 「채식주의자」의 방관적 화자가 결코 영혜의 내밀한 존재를 포착할 수 없다는 점에서, 독자가 영혜의 이해를 위해 기대어야 할 부분은 오직 이 이탤릭체 문장들뿐이다.


그 헛간에서, 나는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 먹었거든. 내 잇몸과 입천장에 물컹한 날고기를 문질러 붉은 피를 발랐거든. 헛간 바닥, 피 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


영혜가 단지 꿈에서 목격한 고기 때문에, 끔찍한 폭력의 희생물로 묘사되고 있는 이 ‘날고기’의 이미지에 질겁하여 육식을 거부하게 되었다면, 이는 지나치게 단순한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나 이 구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영혜 자신의 피칠갑한 얼굴이다. 우리는 베트남 전쟁 참전자 출신의 가부장적 아버지가 심심치 않게 영혜에게 손찌검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영혜가 스스로를 단지 가정 폭력의 희생자 정도로만 여겼다면, ‘물컹한 날고기’의 표상이 굳이 영혜 자신으로부터 분리될 이유가 없으며, 영혜가 그것을 주워 먹는 영상 또한 불가능하다. 영혜와 ‘고기’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유년기의 기억에서 보다 분명히 밝혀진다. 어느 날 키우던 개가 영혜의 종아리를 물어뜯자, ‘아버지’가 잔인한 방식으로 개를 잡았다는 기억이다.


“아버지는 녀석을 나무에 매달아 불에 그슬리면서 두들겨 패지는 않을 거라고 했어. 달리다 죽은 개가 더 부드럽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대. 오토바이의 시동이 걸리고, 아버지는 달리기 시작해. 개도 함께 달려. 동네를 두 바퀴, 세 바퀴, 같은 길로 돌아. 나는 꼼짝 않고 문간에 서서 점점 지쳐가는, 헐떡이며 눈을 희번덕이는 흰둥이를 보고 있어. 번쩍이는 녀석의 눈과 마주칠 때마다 난 더욱 눈을 부릅떠. 나쁜 놈의 개, 나를 물어? (...) 그날 저녁 우리 집에선 잔치가 벌어졌어. 시장 골목의 알 만한 아저씨들이 다 모였어. 개에 물린 상처가 나으려면 먹어야 한다는 말에 나도 한입을 떠 넣었지. 아니, 사실은 밥을 말아 한 그릇을 다 먹었어. 들깨 냄새가 다 덮지 못한 누린내가 코를 찔렀어. 국밥 위로 어른거리던 눈, 녀석이 달리며,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나를 보던 두 눈을 기억해. 아무렇지도 않더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

영혜는 이렇게 언젠가는 자신 또한 폭력의 공범자였음을 기억한다. 꿈을 계기로 떠올라 이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그녀가 역겨워하게 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잠재적 폭력성'을 포함한 일체의 폭력인 것이다. 영혜는 폭력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식물을 동경하게 된다. 그녀가 마치 광합성을 흉내내기라도 하듯 상의를 벗고 햇볕을 쬐기 시작하게 된 것은 「채식주의자」의 결말부에 이르러서이다.




「몽고반점」에서는 영혜의 식물화가 점점 노골적으로 진행되는 동시에, 그녀 안의 정념의 불길이 지닌 파멸성이 ‘형부’의 몰락을 통해 간접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정념(passion)이란 단어는 어원적으로 외부로부터의 모든 영향에 대한 - 그것은 폭력이 될 수도 있고 유혹이 될 수도 있다 - 수동성(passivité)에 관계된다. 숙명적 폭력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을 우리는 수난(passion)이라 부르며, 갖은 유혹과 욕망의 분출을 저항 않고 받아들이는 것을 정념이라 부른다. 이는 흔히 뜨거운 불꽃에 빗대어지곤 했다. 한 편으로는 그 열성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재로 돌려버리는 소진의 위험성 때문에 말이다. 인체 위 ‘꽃 그림’의 강렬한 색채로 표상되고 있는 것은 기실 영혜 안의 정념이다. 기어이 모든 폭력을 제 몸속에 받아들이고, 다시는 내뱉고자 하지 않는 뜨거운 욕망 말이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려왔던 대로였다. 그녀의 몽고반점 위로 그의 붉은 꽃이 닫혔다 열리는 동작이 반복되었고, 그의 성기는 거대한 꽃술처럼 그녀의 몸속을 드나들었다. 그는 전율했다. 가장 추악하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의 끔찍한 결합이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그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물들이고 배와 허벅지까지 적시는 끈끈한 풀물의 푸른빛을 보았다. (...) 영원히, 이 모든 것이 영원히... (...) 이 이미지는 절정도 끝도 허락하지 않은 채 반복되어야 했다.”


예술가의 눈은 진실을 포착한다. 「몽고반점」의 화자가 예술가인 덕분에 우리는 「채식주의자」의 범박한 남편이 보지 못하였던 ‘그녀의 욕망’을 구체적인 표현을 통해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몽고반점」편에서 중요한 대목은 또한, 형부와의 - 아니 사람이 아닌 ‘꽃’과의 - 교접을 통해 스스로의 식물성을 확인한 영혜가, 육식뿐만 아니라 소화행위 자체를 거부해야겠다고 결심하는 부분이다.


“고기만 안 먹으면 그 얼굴들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그녀의 말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의지와 무관하게 차츰 그의 눈은 감겼다. “그러니까... 이제 알겠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 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 앞뒤를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을 자장가 삼아, 그는 끝없이 수직으로 낙하하듯 잠들었다. “이제 무섭지 않아요. ...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


‘형부’는 의도치 않았겠지만 그는 영혜가 스스로의 식물성을 확신하는데 일조하였다. 영혜가 그를 통해 ‘나무’ 그 자체가 될 용기를 얻은 것이 한 편으로는 「몽고반점」의 결말에서 그녀의 모습이 필름에 담긴 모습보다 더욱 눈부시게 매력적인 이유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나무 불꽃」의 이야기가 자기파괴적인 극단으로 치닫는 이유인 셈이다.

「나무 불꽃」은 영혜의 식물화가 완성되는 장이다. 다른 말로 하면 드디어 미치게 되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미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는 현실 감각으로 돌아올 수 없는 환상으로의 침잠으로 정의한다면 말이다. 이제 그녀는 자기 내장의 퇴화를 확신하고 있으며, 비를 맞으러 산림 속으로 사라지고 인간의 말을 점차 버리게 된다.

또한 「나무 불꽃」은 화자가 인혜라는 점에 힘입어, 영혜와 인혜가 마치 분신처럼 유사한 조건의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이 비로소 드러나는 장이기도 하다. 둘은 자매로서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에게서 자랐다. 막내 동생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폭력을 ‘외부’로 돌릴 때, 그녀들은 폭력과의 타협과 무마를 선택하였고, 이러한 전략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 부부 강간 - 사랑 없는 남편들과의 결혼생활에서도 이어진다. 그녀들은 ‘정상’ 규범을 받아들였다. 요리를 잘하고 와이셔츠를 잘 다리는 아내가 되었으며, 아침마다 남편을 배웅하고 반듯한 살림을 일구었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요령’이 부족하여 아버지의 심기를 잘 맞추지 못했다는 영혜가 언니보다 먼저 위기를 맞이했을 따름이다. 위기를 맞은 영혜는 폭력을 내부로 돌리는 전략을 구사하고자 하나 실패로 끝난다. 그녀의 환상 속에서 그것은 모든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완전한 수동성의 성취이지만, 현실에서의 그것은 자기 파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작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은 영혜이되 주인공은 인혜라는 말로 정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미쳐버린 영혜가 던지는 위험천만한 질문 즉, ‘나무 불꽃’에 대한 인혜의 항의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조용히 그녀는 숨을 들이마신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은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인혜는 과연 자기 파괴적인 ‘나무 불꽃’에 옮겨 붙고 말 것인가, 인혜에 감정이입한 독자 역시 이 질문을 통해 스스로를 반성하게 된다.

나 또한 언젠가 이 모든 폭력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워질지 모른다. 숨 막히도록 끔찍한 상호구속이 ‘사랑’의 이름 아래 유통되는 가정이, 활활한 욕망의 실현을 기성의 각종 규범으로 억누르는 사회가, 왜 그렇게 드물 것이며 어디 그리 먼 것이던가. 언제든 성큼 다가올 수 있는 그 갈림길에서, '나라면 나 자신을 파괴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 『채식주의자』는 ‘나무 불꽃’을 통해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