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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개미핥기 Jan 01. 2021

Moo'tice

#30, '난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구나'


우리의 번호가 호명되고, 우리는 안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때까지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가상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마치 진짜 만나게 된 것처럼 나의 넓디 넓은 상상력 안에서 다양한 상황극이 리얼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리얼 상황극은 크게 3가지였다.


첫째, 모르는 척 무시한다. 우선 그 사람과 눈을 마주친다. 속으로는 흠칫 놀라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은 척, 직원이 안내하는 손짓에 따라 움직인다. 그 이후, 친구들과 좌석에 앉아 물부터 따르고, 자연스럽게 주문을 한다. 아니, 이게 아니다. 미리 준비해놨던 음식들이 곧 줄줄이 나온다. 그리고 친구들과 맛있게 먹으며, 그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한다. 


둘째, 어색하게 인사만 한다. "아..안녕하세요. 잘 지냈어요? 밥 맛있게 드세요."라는 어색한 인사를 하고, 친구들과 자리에 앉는다. 그러면 친구들은 내게 물어볼 것이다. "누구야? 아는 사람이야?" 그러면 나는 자연스럽게 대답한다. "응. 전 여자친구 ^^" 그렇게 행동한 후에, 친구들과 주문한 메뉴를 맛있게 먹는다. 그 후에, 근처에 약국을 들러 체끼를 내리기 위해 까스활명수를 사먹는다. 


셋째, 완전 친근하게 인사한다. 그리고 그 같이 있는 남자에게 밝힌다. "안녕하세요. 그 사람의 전 남자친구입니다. 행복하게 잘 만나세요. ^^" 이 생각은 정말 어이가 없다. 찌질의 극치이기도 하고, 다르게 보면은 당당함의 극치이기도 하다. 그 이후로는 생각을 못 했다. 이 행위는 절대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후는 생략.


하지만 이 3가지는 모두 헛된 생각이었다. 그 사람과 마주칠 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시야가 좁아져, 그 사람이 나간줄도 모른 것이다. 정작 자리에 들어가며 주변을 둘러보니 그 사람은 없었고, 다른 단란한 가족이 앉아서 밥을 먹고 있었다. 내가 입구와 등을 돌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그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간 것이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지만, 한심하다는 생각이 더욱 크게 들었다. 다가오지도 않은 일을 걱정했으며, 찌질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죄인처럼 행동했고, 비굴하게 행동했다. 나는 단 한 번도 그 사람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단지, 그 사람의 기준보다 낮은 자본적 지위를 지니고 있었을 뿐이다. 그 때문에 내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었고, 행동했다.


그 때문인지 송정집에서 친구들과 자리에 앉고 나서 더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못난 사람이 아닌데, 이럴 필요가 없는데, 왜 그러지? 그렇게 행동할 필요가 없는데, 나는 잘났는데, 그 사람보다 못난 거라면 우리 집이 조금 가난하다는 것일 뿐인데, 내가 왜 머리를 조아리고, 수그리고, 얼굴을 들지 못하고, 땅바닥만 쳐다보며, 내 자신을 한심하다 여겨야 하는 거지? 나는 살면서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고, 남들에게 해도 끼치지 않았고, 열심히 살아왔는데, 내가 왜 이래야 하는 거지?'


그리고 한 가지 덧붙여 생각했다.


'난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구나'


그 생각을 끝으로 친구들과의 시간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우리는 송정생김밥 2인분, 비빔국수곱배기, 물국수곱배기, 찜만두 2인분을 시켜 맛있게 먹었다. 다행히 마음이 진정됐는지 주변 약국을 찾아 헤매일 필요가 없었다. 또한, 처음과 다르게 너무나 맛이 좋았다.



ps. 그 사람이 나가는 모습을 못 본 것인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저 '그 사람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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