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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개미핥기 Jan 21. 2021

Moo'tice

#41, 나의 소중한 박힌 돌


커피 가게로 자리를 옮긴 후에 별다른 일은 없었다. 선생님은 주변 교수님들께 연락을 몇 번 하고, 추후에 알아봐 준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그렇게 자리를 마무리하고 선생님 연구실에 들러, 조교분이 건네주는 주차권을 받아 들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사실 선생님과 함께 연구실로 가는 길에 선생님께서 힘이 되는 한 마디를 남기셨다. 


"박사 따고 오면은 선생님이랑 같이 연구하자. 나도 문화랑 문화사에 관심이 많잖아. 우리 학교 특성상 문화를 연구하는 대학원생들이 없기도 하니까, 네가 와서 같이 연구하면 좋겠다. 물론, 내가 그때까지 있어야겠지?"


사실 선생님은 연구소장을 지낼 정도로 학교 연구소에 자리매김을 한 상태이다. 하지만 여전히 '교수' 타이틀은 앞에 수식어가 붙는 '연구교수'일 뿐이라, 이 자리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는 걱정을 가슴 한 구석에 품고 계시기는 하다. 그런데도 나는 선생님이 끝까지 남아계실 거라 믿는다. 모교에서 나온 거의 유일한 국문학 박사님이면서, 연구소에서 한 축을 담당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많겠지만, 그만큼 믿을 만한 사람은 찾기 힘든 실정이다.


위에서 억누르고 억지로 떼어내서 다른 사람으로 끼워 맞춘다면 가능하겠지만, 모교 교수님들로 이루어진 연구소에서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본래 선생님의 자리'는 '연구'가 붙지 않는 자리였다. 하지만, 굴러들어 온 돌에 의해서 '연구교수'의 자리로 튕겨져 나가 버리는 사태에 이르렀다. 지식의 상아탑이라 불리는 곳은 권력판에 의해서 움직였다. 그 권력판에서 벗어나 있던 선생님은 튕겨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


모교는 타학교 교수님들이 많이 포진돼 있었다. 특히, 한 곳 출신 교수님들이 많았다. 그분들은 줄지어, 연쇄작용처럼 우리 과 교수님으로 배정됐다. 그분들이 올수록 우리 학교, 우리 과의 질은 높아졌다. 더 좋은 학벌, 더 좋은 연구를 거듭한 분들이 배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벽은 견고해져, 모교 출신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제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한 번은 모교 재단을 소유한 회사가 이를 막기 위해 이사회에 안건을 제기했다. 그리고 문제가 거의 해결되는 듯했다. 하지만 학교 이사장이 저지른 비리 문제가 터졌다. 그 액수만 몇 천 억대였다. 동시에 모교 소유 회사가 사업 확장을 하던 중, 글로벌 금융 위기가 닥치면서 상당한 액수가 고스란히 빚으로 남게 됐고, 결국 재계 서열에서 벗어나 법정관리에 이르게 됐다. 이런 상황이 동시에 겹치면서 학교 경영진에 대한 위기론이 대두됐고, 결국 모교 출신 존재에 힘을 실어주려던 계획이 무산됐다. 


계획이 무산됨과 동시에 하나 남아있던 정교수 TO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그 사람은 역시 타학교 출신이셨고, 연구에는 유능할지 몰라도, 수업에는 유능하지 못하신 분이었다. 팔이 안으로 굽어서가 아니라, 연구를 잘하는 것과 수업을 잘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만은 엄격함과 까칠함을 갖추고 있어, 자신을 객관화하는데 비판을 열심히 하셨으며, 남들의 연구 실적 또한 열심히 비판하셨다. 그러한 비판들이 다 논리적이어서 비난으로 들리지 않았고, 호기심으로 학생들에게 다가왔었다.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며 연구에 호기심을 가지고 뛰어들었다. 뛰어들고 난 후, 나 또한 선생님처럼 교단에 서는 일을 맡게 됐다. 하지만 나는 연구를 열심히 할지는 모르지만(사실 이 마저도 부족한), 수업에 유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특히, 동기나 선배들의 연구수업 감독관으로 들어가기만 해도 그 차이를 느꼈다.


동기들 수업 참관 후, 나는 '수업이라는 것을 그만둬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잘하는 사람은 특유의 전달력과 설득력 그리고 흥미가 보태어져 있었으며, 모두의 집중력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집중력 자체를 받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애초에 맞지 않는 위치였다. 모두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여하튼, 선생님은 결국 굴러온 돌에 의해 중심이 아닌 가외로 밀려나게 됐다. 그 이후로 선생님은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내건 연구실이 아닌, 연구소의 일개인으로 표현되는 연구실에 속해 있었다. 자신의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나를 챙겨주는 선생님의 마음 씀씀이를 생각하며 '열심히 해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또한, 수업보다는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그 환경에 속하고 싶었다. 본래 나의 꿈도 '교수자'가 아닌, '연구자'였기 때문에 그 제안이 마음속에 깊이 남았다.


그 제안을 마음에 품고 나는 차를 타고 집으로 떠났다. 그리고 이틀 후에 만날 선배에게 던질 질문들이 머릿속을 헤엄쳐 다녔다. 그 질문들은 마치, 평생 물음표에서 느낌표나 마침표로 전환되지 않고 떠돌아다닐 거 같았다. 






ps. 이 글을 쓰며 선생님께 연락을 한 번 드려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연초를 맞이하며 연락을 드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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