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에게 배운다
*끝의 반대에 꽃이 피다
봄볕이 어설픈 날, 지인에게서 화분 두 개를 받았다.
“자네를 똑 닮은 꽃이 필 걸세.”
식물에 관심이 없던 나는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펌킨 사랑초 구근을 분양해 넣어 두었다고 했다. 잎도 꽃도 없는 화분엔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변화가 시작되었다. 흙을 밀어 올리는 힘이 느껴지고, 줄기 하나가 머리를 들었다. 마치 어둠을 찢고 나오는 것처럼, 연둣빛 잎이 햇살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줄기는 화분 곳곳에서 터져 오르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손톱 만한 주황색 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빛을 향해 고개 돌리는 꽃잎 사이로 빛이 투영하듯 찬란했다. 창문을 열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앙증맞기까지 했다. 그 모습이 기특하고 아름다워 화분 앞에서 서성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꽃은 금세 시들었고, 잎도 붉어지며 말라갔다.
햇빛을 좋아하고 물을 ‘적당히’ 맞춰줘야 한다는 지인의 당부가 있었지만, 나는 그 ‘적당히’를 끝내 알지 못했다. 물을 주거나, 아예 잊거나. 그저 하고 싶을 때 물을 주거나 말리거나였다. 무심함이 낳은 결과는 말라붙은 잎과 죽은 줄기뿐이었다. 결국 한여름 땡볕에 바스락하게 말라버린 잎을 모두 뜯어냈다. 버릴 요량이었다. 두 화분 모두 그렇게 생을 접는 듯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한 줄기, 아주 가는 줄기 하나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랬다. 보다 못한 작은 아이가 혹시나 싶어 물을 주었다. 그 물로 마지막 힘을 모아 제 존재를 드러내는 게 아닌가. 나는 다시 물을 주고, 작은 영양제 하나를 꽂고 비료 몇 알을 놓아주었다. 며칠 지나니 줄기는 기세 좋게 자라기 시작했다. 계절은 이미 강렬한 여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오전 볕을 쬐고 햇빛이 강한 점심 무렵엔 그늘로 들였다. 시집살이가 따로 없었다. 흙의 마른 기운을 살피며 흙이 마르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썼다. 물의 양도 일정하게 맞추었다.
“여름은 사랑초가 꽃을 피우지 않아. 휴면기거든.”
그런데 며칠 전부터 꽃대가 올라오고 이내 꽃이 피기 시작했다. 잎 사이사이로 조심스럽게 연한 꽃대가 솟고, 이내 주황빛 꽃망울을 틔우는 게 아닌가. 꽃이 지면 꽃대를 꺾어주어야 새로운 꽃대가 올라온다는 지인의 말에 열심히 살피고 조심스레 꺾어주었다. 꽃대가 부러질 땐 ‘똑’하는 소리가 났다. 마음이 아팠다.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다 진 줄 알고 꺾은 꽃대에서 또 다른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본 건 며칠 뒤였다. 꽃은 나흘 째 버티고 있다. 가녀린 몸으로 흔들리며 제 생을 다하고 있다.
진 꽃대와 피려는 꽃대를 구분하지 못했다. 지는 것과 피는 것, 그 어긋남의 찰나를 분별하지 못한 나의 무지함은 힘껏 제 세상을 펼친 생을 꺾고 말았다. 나로 인해 꺾인 채로도 다시 피워낸 생을 볼 때마다 미안함이 깊어진다.
나는 스스로 사랑초를 키운다고 자부했지만, 정작 끝까지 그들의 흔들림의 생을 바라본 적 없었다. 꽃이 피었을 때만 사랑했고, 잎이 시들면 실패로 여겼다. ‘적당히’를 몰랐고, 기다림에 서툴렀고, 진 것과 피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를 변명 삼았다.
진 줄 알았던 꽃대에서 피어난 주황빛을 보고서야, 내 안의 조급함이 얼마나 많은 생을 오해해 왔는지 깨닫는다. 피어남은 내 덕이 아니고, 시듦은 그들의 탓이 아니다. 그들의 생은 나만 몰랐을 뿐, 그 자리에 있었다.
사랑초 앞에서 나는 나를 본다. 오래 참고 솟구치는 시간의 흔적보다 눈앞의 결과를 더 중시하지는 않았을까. 살아 있는 것을 다 헤아렸다고 믿고 단정하지는 않았을까. 그때마다 너무 쉽게 등을 돌리고, 너무 빠르게 판단하지는 않았을까.
꺾인 꽃대에 핀 꽃을 보며 내게 묻는다. ‘끝’이라고 믿어왔던 인연, 시간들 속에 정말 끝은 어디였느냐고. 충분히 화해할 수 있었고, 충분히 다시 이어갈 수 있었던 시간이 있지 않았느냐고. 미움으로 덮었던 마음에도 아직 따뜻함이 남아 있었고, 놓아버린 관계에도 못다 한 말이 남아 있지 않았느냐고.
충분히 건널 수 있었던 고비를, 오해의 골을 깊이 새겼던 건 너와 나 피차 마찬가지였다고. 꽃은 고요히 피어 있고, 나는 비로소 오래 묵힌 감정들 들춘다. 끝이라 단정했던 인연이 자꾸 떠오르는 건 ‘다시’라는 희망이기도 할 텐데. 후회, 어쩌면 그때 용서하지 못했던 내 나약함에 대한 후회인지도 모르겠다.
살아 있다는 건, 다시 피워내고 싶은 마음 한 자락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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