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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기혜 Jul 21. 2021

가내 인셉션

  나의  어머니는 살기 위해 각자 허구의 세계를 만드셨다. 시어머니는 전지전능한 남편을 세상 질서로 두고, 남다른 자식들이 입신양명을 지향해 살아가며, 당신은 썩어 거름이 되는 세상을 구축하셨다. 한편,  엄마는 삶은 아름다운 , 고난마저 축복이니 건강한 것에 감사하며 각자 인생을 즐기자고 믿는 세상을 지었다.     


  이 둘이 가상현실인 것은, 두 분의 이상이 다른데도 일상이 일치하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두 분 다 밤새 자식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들지 못하고, 새벽에 일어나 집안일을 하고 미완의 캐릭터가 집 안에 늘어놓는 희노애락을 돌보며, 그 와중에 위와 같은 세상 질서를 그들이 믿게끔 하였다. 나 역시 내 몸으로 사람을 둘 낳고서야 엄마 덕에 믿고 산 즐거운 세상이 견고한 현실이 아님을 깨달았다. 한밤에 깊은 잠 못 자고, 내 일 하나 없는데 하루가 버겨운 킥이 수시로 작동해서다.     


  내 엄마의 삶은 엄마가 말한 것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엄마는 건강해서 안 아픈 게 아니라 아프면 안 되니까 못 아팠던 거다. 시어머니가 품은 가족들을 살펴보면 그리 매끈한 인물들이 아닌 걸 곧 알 수 있다. 하늘에서 호령하는 듯한 남편은 차라리 거기 올라 있는 게 낫겠고, 까다로운 자식들이 각자 살 수 있어 뵈는 길을 깔아주느라 노심초사하셨을 거다.     


  영상통화에서 울 엄마는 손녀딸 보기 좋으라고 엄마가 그린 커다란 풍경화를 배경으로 놓고 분홍 꽃모자를 쓰고 나왔다. 시어머닌 앞치마에 뒤집개를 들고 나왔다. 심장에 인공박동기를 달고도 자식 앞에 게으르면 안된다고 일 년 일곱 번의 제사를 혼자 차리시는 중이었다. 각자의 인셉션을 지키는 것이다. 이제 자식을 기르는 내 눈엔 엄마 뒤 풍경화가 8개월째 새 그림으로 바뀌지 않는 것이, 어머니가 친척들 오기 전에만 미용실에 다녀오시는 것이 보인다.     


  나이 든 엄마는 예전처럼 짱짱한 인셉션을 설계하지 못한다. 나의 정리 안 된 얘기, 삐죽이는 농담, 세상서 물고 온 흥분들이 더 이상 엄마 세상에 담기지 못하고 툭툭 나동그라진다. 엄마의 피곤, 짜증, 울음들과 함께. 시어머니는 나와 산책을 하다가 문득 인생의 마지막은 모든 인연과 체면을 끊고 절에 가서 보내고 싶다고 했다. 허구의 세계를 버티던 그녀의 힘이 떨어져 가나 보다.     


  남편은 나와 함께 자식을 기르면서 아직 어머니의 허구 속에 살고 있다. 너와 내가 꾸린 집엔 왜 거름을 자처하는 엄마가 없냐고 다그친다. 내게 자꾸 시어머니 꿈속의 꿈으로 가자고 한다. 게으른 부인 킥도 먹히지 않는다. 나는 이 남자를 내 엄마가 날 키운 가상 세계 속 ‘고난’으로 품어야 할까. 두 어머니의 인셉션은 이미 무너지고 있지 않은가. 난 남편과 허구 밖에서 일상을 얘기하고 싶다. 남편에게 딱 맞는 팽이를 찾아 주고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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