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의 기억
일과 대학원을 병행하던 무렵 결혼을 했다. 남편은 유학 준비로 바빴으니 신혼이라고 깨소금을 볶던가 음식 플레이팅을 예쁘게 해서 사진 찍어 올리던가 할 때가 아니었다. 장을 볼 줄도 냉장고 관리를 할 줄도 몰라서 식재료 갖다 버리기를 몇 번 하고 나자, 냉장고는 비워두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취 경력 많은 남편이 대학생 MT 느낌의 아침상을 차리면 그걸 먹고 나가서 각자 살다 돌아오는 생활이었다. 집에 가면 엄마 밥이 있던 시절과 달리, 내 집에는 성에 낀 냉장고 뿐이어서 밖에서 음식을 고를 때 점점 신중해졌다. 부부 백수를 앞두었으니 더 싸게, 바쁘니까 더 빠르게, 냉장고 생각하면 허전하니까 더 든든하게. 정답은 언제나 김밥이었다. 보통 날은 천원 김밥을, 엄청 수고한 날은 2천 5백원 김밥을, 기운 내야 하는 날은 땡초 김밥을, 라면 먹고 늘어지고 싶은 저녁은 치즈 김밥을 골랐다. 야채 하나 장 볼 값으로 기분에 맞춰 골라 먹고 집밥 얻어먹던 시절 상 위에 오르던 갖은 재료를 단번에 챙겨 먹으니, 먹고 사는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는 스스로가 기특했다. 그러나 풍요롭고 후한 것은 간과되기 마련이라 이 모든 것이 김밥 천국 대한민국에 사는 덕분임은 몰랐다.
남편이 공부할 미국으로 건너 가서야 살림을 시작했다. 일상에 당연한 것들이 하나씩 덜 채워진 불편함은 낯선 곳에선 생각보다 크고 오래 갔다. 밥솥은 있는데 쌀이 없고, 바닥 난방이 없으니 이불이 아쉽고, 중고차를 사야는데 아는 사람이 없었다. 밥을 해 먹을 수 있고 차가 생기고 어디 어디 가면 한국 반찬을 사 먹을 수 있다는 정보를 갖추기까지 6개월이 지났다. 당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원달러 환율이 가파르게 오르고 난 후였다. 한국 통장에 돈을 두고 온 터라 장을 보러 가면 절로 달러에 환율을 곱하게 되었는데 내게 기준이 될 물가란 김밥 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밥을 해 먹지 않았으니 한인 반찬 가게에서 오이무침, 도토리묵, 완자전의 달러 표기에 환율을 곱해 봤자 감이 오질 않았다. 그런데 김밥이, 20대에 나를 먹여 살린 김밥이, 이 가게 어느 반찬보다 돋보이는 자리인 계산대 앞에 놓인 김밥이, 눈코입이 가운데로 쏠린 사람과의 첫 만남처럼 어딜 봐야 할지 어색한, 밥만 많은 김밥이 5달러였다. 그 동네 간단한 점심값에 맞춘 가격이겠으나, 나는 김밥이 천 원인 나라에서 왔고 머릿속에 1달러마다 천 오백을 곱하는 계산기가 장착되었으므로 5달러를 7천 5백원으로 읽게 된다. 말간 랩 속에 만져보지도 않은 김밥이 싸늘히 식어 보였다. 너와 나는 이제 멀어지자고. 초연한 척 물러서는데 옆에 놓인 김밥 앞에서 마음이 우지끈 소리를 냈다. ‘소고기김밥 $7.50’.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반찬 가게에서 나와 아시안 마트에 갔다. 김밥 재료를 샀다. 한국에선 한 번도 안 말아본 김밥인데, 또르르 한 줄 말 때마다 이 환율을 되돌릴 수 있다는 듯이, 김밥 만 원을 내 손으로 막아 보겠다는 듯이. 터지고 풀어지는 김밥만 내놓던 실력이 점점 늘어 열 줄 스무 줄은 깔끔하고 거뜬하게 해냈다. 손님도 먹이고 이웃도 줄 만큼. 유학 비용과 졸업 후 거취의 막막함 사이에서 마음이 짓눌릴 때마다 김밥을 말아댔으니 수백 줄은 쌌겠다. 수년이 지나 한국으로 취업을 하고 살 곳을 구했는데 이사 온 아파트 1층에 구인 광고가 붙었다.
‘김밥 싸는 아주머니 구함.’
남편이 게시판을 보다 말했다.
“여보, 당신 찾는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