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과 노동
남편의 유학 초기, 위도가 만주벌판이라는 미 북부 겨울밤 현관문 앞에서 지갑과 여권을 손에 든 참이었다. 나는 말을 ‘내가 김밥을 말아도’로 시작했다. 격분의 순간이라 이어진 말이 정확치 않은데 하려던 말은 ‘너랑 사는 일에 불평은 안 할 테니, 너도 내 탓 말고 네 할 일을 하렴.’이었다. 더 앞선 맥락은 백수였던 총각이 장래 희망이라도 밝혀야 장가를 가니까, 유학을 가겠다 결혼을 해 놓고, 막상 와보니 앞이 캄캄했고, 영어 대피소 집구석에 드러누웠고, 소소한 일상이 거슬렸고, 모든 불안이 부인 탓이라던 참이었다.
결혼은 처음이라 둘의 옥신각신은 거칠고 느닷없었다. 지금에야 시간이 알려준 이해의 방정식에 그 시절을 넣어 본다. 잘 하고 싶은데 겁은 많은 아이가 제풀에 지치면 집에 와서 온갖 투정을 다 부려야 다시 일어날 심정이 될 테다. 그때의 남편은 함께 사는 여자가 엄마인지 아내인지 구분할 필요를 몰랐고 그때의 나 역시 집 안에서 누굴 애써 이해하고 품은 적이 없었다. 이 결혼은 망했다 싶었을 때 여권과 지갑을 들고 현관문 앞에 서서 윽박을 지르던 참이었다. 네가 유학을 때려치우고 내가 길에 나가 김밥을 말아도 네 탓은 안 할 테니 너도 남 탓 말고 네 할 일을 하라고.
그런데 왜.
김밥이었을까? 김밥은 내 마음 어떤 보자기에 쌓여 있다가 인생이 뒤집힌 것 같은 순간에 조건절이 되어 톡 튀어나왔을까. 할머니로부터 엄마로 자식 세상에 좋은 걸 싸 보내며 이어 살아가겠다는 팔팔한 의지에서였을까. 한 가족의 어른이 길바닥을 절벽처럼 마주한 유리창 안에서 시선을 거두고 노동하는 모습을 본 불편함에서였을까. 한 줄에 7달러가 넘는 소고기 김밥을 보고 이 나라 어디서든 부지런을 떨면 입에 풀칠은 하겠다는 안도의 실마리였을까.
격투기 같던 신혼은 건투의 40대로 변했고 수시로 송연했던 유학 시절은 밥 벌어 먹고사는 안온함으로 덮였다. 그때의 미숙한 마음도 거친 말투도 세월 타고 흘러간 줄 알았는데, 내 으름장의 말머리였던 ‘김밥을 말아도’가 걸렸다. 그 사이 불어난 식구를 먹이는 일은 아무리 용을 쓰고 머리를 굴려도 콤팩트하게 줄어들지 않았다. 엄마로 사는 일이 아주 거대한 비효율임을 알게 된 때, 한 눈에도 넘쳐나는 수고가 한 줄로 말아져 드러누운 김밥은 내 삶의 단면처럼도 보였다. 게다가 코 앞에서 다른 여자의 노동을 맞닥뜨리는 이 나라 김밥집의 구조는 내가 오래전에 뱉은 말을 톡톡 건드렸다.
나는 내 말을 만나러 가 봐야 할 것 같다. 김밥을 말아도가 아닌 김밥을 말아서 어떻게 되는지. 너랑 사는 일에 불평도 하지 않고, 사람을 길러 먹인 노동에 인사하러, 이 복잡다단한 일을 김밥 한 줄로 만들어 버리는 세상에, 김밥을 말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