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의 기억
엄마는 속 재료를 아홉 가지나 넣어 말아주며 내게 ‘김밥’이라 알려줬다. 김밥은 이런 거라고. 감각과 단어는 동시에 각인되었다. 그런데 소풍 날 도시락 뚜껑이 열리자 김밥의 정의가 한 가지일 수 없음을 알아차리는 순간이 왔다. 친구네 김밥엔 오이, 소세지, 계란 세 가지만 들었는데, 단순한 재료가 삼원색처럼 어울려 눈에도 예쁘고 맛도 좋았다. 울 엄마는 아홉 가지 재료가 들어가 끝내주는 김밥이랬는데 세 가지뿐이어도 맛이 있다니. 도시락 주인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데 분홍, 초록, 노랑을 품은 잔상은 남았으니 김밥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꽤 강렬했나 보다.
이후로 김밥 세계의 두 번째 충격이라면 충무김밥을 만났을 때다. 때는 스마트폰이 생기기 전의 여름 방학, 동네 친구랑 통영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버스로 일곱 시간을 내려갔는데 도착해서 보니 친구 지갑이 없었다. 서울 고속버스터미널 공중전화 부스에 두고 와 버린 거다. 한 사람 경비로 둘이 여행하려니 먹는 데서 아끼는 수 밖에 없었다. 최후의 만찬처럼 여겨지는 첫 끼를 먹고 아침은 거른 후, 매물도로 향하는 여객선 터미널로 갔다. 승선을 기다리는데 길 건너편이 죄다 충무 김밥집이다.
“먹을까?”
“저거 먹을 건 없고 비싸대.”
“그래도 충무 와서 충무김밥 안 먹으면 어떡하냐.”
도돌이표처럼 맴돌던 대화를 임박한 뱃시간이 끝맺어 주었다. 일단 먹어보자고, 둘은 냅다 뛰어 길을 건너가 1인분을 사서 배에 올랐다.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포장을 풀어헤쳤다. 스마트폰도 SNS도 없던 시절이니 ‘충무김밥’은 단어로만 들어봤을 뿐, 사진이나 맛리뷰를 접해보지 못했다. 기름기 하나 없이 흰밥에 척 달라붙은, 김에 싼 밥 여덟 덩이를 마주하고도 입에 넣으면 내가 모르는 맛이 날거라 기대했다. 때마침 짝수이니 친구와 나의 몫은 분명했다. 너 하나 나 하나 남의 것 하나 더 먹지 않기. 아, 그런데 이 심심함은 뭐지? 우리가 돈이 없어서 맛도 허전하냐? 배가 흔들려서 맛을 못 느끼는 중인가? 하나 더 먹어보자. 나 모르는 맛이 숨었나? 정말 이게 다야? 어! 김밥이 모자르다. 사장님이 무침을 많이 넣었나? 친구야, 이거라도 싹싹 먹을까? 배고프잖아. 그런데 좀 맵고 짜다. 그치?
유명 먹거리 하나는 맛보았다는 뿌듯함은 금새 사라지고, 여객선을 흔드는 파도처럼 의구심이 넘실댔다.
‘우리가 먹은 게 정말 충무김밥이었을까?’
속도 양념도 없는 김밥이 있다니.
‘옆집 충무김밥은 다르게 생기지 않았을까?’
한 곳 더 가 볼 여비가 없으니 새빨간 무침처럼 의심도 덩그라니 남았다.
그날 먹은 충무김밥이 정말 충무김밥이었음을 알게 된 때는 나이가 들어 몇 곳을 더 가 본 후였다. 1인분이 여덟 개인 이유는 사장님 손이 작아서가 아니라 김 한 장을 네 조각으로 잘라 4의 배수가 되기 마련이어서고, 짜고 칼칼한 무침이 남은 이유는 뱃사람들이 선상 술안주 삼을 수 있도록 부러 넉넉히 내는 게 이 음식의 특색이어서 그렇다는 얘기도 훗날 주워 들었다.
아홉가지 속재료를 뽐내도 김밥이고, 정갈한 삼원색을 담아도 김밥이고, 참기름 한 방울 안 떨어뜨고도 충무에서 서울까지 소문 나는 게 김밥이라니. 세상엔 내가 모르는 김밥이, 그 김밥이 필요한, 나는 살아보지 못한 인생이 얼마나 많을까. 가서 마주하고 먹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김밥이 가리키는 삶들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