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기혜 Jul 19. 2024

10 검은 건 김이요, 흰 건 밥이라

김밥의 기억



명확히 김과 밥뿐인데도 사람들은 김에 맨밥을 싸 먹고는 ‘김밥 먹었어.’ 하지 않고 ‘김에 밥 먹었어.’라고 풀어 말한다. 밥상 위에 풀어 나온 형식을 엄중히 따르기라도 하듯이.     

중학교 때 반에서 제일 예쁜 아이가 우리 집에 숙제를 하러 왔다. 간식거리를 파는 가게가 지금처럼 흔하지 않아서, 엄마가 두 손 가득 장을 봐서 부엌에서 지지고 볶아야만 책가방을 던져 놓고 배부르게 먹을 간식이 있던 때다. 그래도 어쩐지 샴푸 냄새도 더 좋고 휘황한 책가방을 멘 친구들 집에 가면 영어 쓰인 포장에서 꺼낸 초코칩 쿠키나 신기방기한 전자렌지 팝콘을 구경은 해본 때였다.     

숙제를 하는 데 두 시간은 족히 길어지자 엄마는 (망설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어느 타이밍에 (간식일 것으로 짐작되는) 상을 차려 들어왔다. 턱 내려놓은 개다리 소반에 대접이 두 개인데, 하나는 부엌 가위로 숭덩숭덩 자른 김이 들었고 다른 하나에는 고봉밥에 숟가락이 꽂혔다. 그 옛날 안테나처럼 푹. 내 친구의 초리한 속눈썹은 김처럼 까맣고 피부는 찬밥처럼 맑고 희었으니 어울리는 간식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 나는 뭔가 부끄러웠다.

“자, 먹자!” 대신 “음.." 잠시 말을 고르다가 "우리 집은 이렇게 먹어…” 했던 것 같다. 전국 방방곡곡 흰밥을 김에 싸 먹는 법을 모를 집구석이 있단 말인가. 예쁜 친구는 마음도 예뻤는지 김에 뿌려진 반짝이는 소금처럼 알맞게 웃었다. “넌 좋겠다.” 했던가, "이렇게 먹으니 맛있다." 했던가. 친구의 상냥함 덕에 내 기분도 밝아지며 사발에 담긴 밥을 다 비웠다.     

쉬는 시간마다 불러내고 보러오는 사람이 많았던 친구와는 숙제를 같이했어도 더 가까이 사귀어 볼 기회는 없었던 것 같다. 후에 들려온 소문 중에 그 집 엄마는 외모 관리를 위해 라면은 반 개만 끓여서 국물은 버리고 주고, 예쁜 자세를 가꾸려고 방바닥에 앉지도 못하게 한다는 얘기가 있었다. 중학생 시절의 질투와 호기심이 퍼 나른 이야기이니 그대로 믿지는 않았는데도, 나는 들은 대로 삼엄한 남의 집을 머릿속에 그려 보기는 했다. 그래야 방바닥에 퍼질러 앉아 김 가루 부슬부슬 흘려가며 기름 묻은 손가락을 바지에 쓱 닦던 우리집이 그 친구에게 이국적인 인상이라도 남기지 않겠는가. 민망함의 자리에서 숟가락 꽂힌 찬밥의 기억을 구하는 대신 두둑한 내 뱃살과 엉덩이를 두어야 했지만 말이다.     

이전 09화 09 김밥의 외주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