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과 노동
첫날
“하다 보면 다 할 수 있어요. 배우면 돼요. 무엇이든 서로서로 좋게. 내가 먼저 해 주면 다 잘 일할 수 있어요.”
친절하고 긍정적인 말이 좋았다.
호칭
정희 언니, 에이미 언니, 선애 언니. 나이가 많아도 이 언니, 나이가 어려도 저 언니다. 나이가 젤 어린 나도 첫날부터 ‘기혜 언니’가 되었다. 직함없는 부엌에 만든 언니들의 세상. ‘김밥’만큼이나 정의 불가한 ‘언니’라는 말
보험
일곱 시간을 일하는데 앉을 의자가 없다. 비좁은 공간에서 몸을 쓰고, 화상과 미끄러짐의 염려가 든다. 일에는 휴식시간이 없고 파트 타임으로 일하면 보험도 없다. 첫날 들은 좋은 말이 서로의 보험이고, 최소한의 휴식이고, 안전장치인지도.
인연, 우연
오늘 만난 언니들은 모두 노부모를 모시고 있었다. 아버지한테서 숨통을 틔우느라 일하러 나왔다고도 했고, 엄마가 불러서 오전에 쉬지 못하고 일하러 나온다고 했고, 엄마를 돌보아야 해서 일을 그만둬야 한다고도 했다. 한 부엌에 그런 사람이 셋.
성과
일곱 시간 동안 약 120줄을 말았다.
아침 인사
“애들은 아침에 어떻게 하고 왔어? 버스 타고 올려면 많이 추웠겠다.”
힘든 점
공간이 좁고 공기가 나쁘다. 여자 네 명이 몸을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이걸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한다면, 그건 다른 차원의 무게일 거다. 배우자의 출근을 떠올려 본다. 그의 일터에 가족 아닌 만족이 있길 바람
오늘 들은 좋은 말 1
“사장님 고맙습니다. 나를 써 주셔서. 나 월급 받았어. 나 오늘 부자야. 사장님 내가 선물을 하나 사드릴까?” 예순 일곱 살 왕언니의 출근 인사
사장에 대하여
일을 꼼꼼히 체계적으로 그리고 욕심 많게 알려준다. 내가 일을 하나라도 더 하길 바라는 거겠지.
노동요
좁은 부엌에서 자주 몽롱해진다. 수다가 노동요를 대신하는데, 나는 말이 없어서 재미없는 짝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근육통
목과 등이 아프고 고개를 숙이면 두통이 온다.
기분
노동과 내가 받는 임금 사이에서 생각과 정체성이 오락가락한다. 나는 스스로를 먹여 살리는 노동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었나. 퇴근할 때 옷에 참기름 냄새가 가득 배었다. 집에 가서 욕실 앞에 옷을 벗어 던질 때까지 일터가 따라오는 것 같다. 좀 싫다.
안부
둘째 아이가 물었다. “엄마, 알바는 어때?”
장단점이 있다고 답했다.
인수인계
먼저 온 언니가 내 앞치마를 빨아 뒷여밈이 풀어지지 않도록 손바느질을 해 두었다.
주말
첫 토요일이다. 주말엔 바쁘다. 아침부터.
느낌
내내 머리를 숙이고 있자니 목에 돌을 매단 것 같다. 와중에 김밥 절단기가 작동을 멈추어 손으로 급히 칼질을 했다. 굳은 어깨 근육이 찢어지듯 아팠다. 목을 뒤로 꺾으며 돌아오는 길에 그간 일 한 값을 계산해 봤다. 42만원. 마음이 몽실몽실
캐치프레이즈
가게에서 쓰는 김밥 절단기의 가격은 4,620,000원.
기계 제조사인 ‘럭키엔지니어링’ 홈페이지에는 ‘조금 더 편안하게 조금 더 행복하게’ 라고 적혔다. 문구가 내 마음에도 김에 쌀밥처럼 착착 붙는다. 김밥을 써는 어깨의 통증을 아는 사람이 만들었나보다.
오늘 들은 좋은 말 2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세요. 감사합니다.
실수-환불
배달앱의 제한 시간을 못 맞추어서 환불을 했다. 좁은 김밥대에서 사장과 나란히 붙어 사과를 하자니 엄청 난감하다.
수치심?
새 알바에게 궁금한 걸 묻는 언니들의 질문 속에 여자의 노동을 부끄럽게 여기는 낌새를 느꼈다.
“김밥집에서 일한다니까 남편이 뭐라고 해?” (응, 그래 하고 말았는데요.)
“요즘 아이들 학원비가 그렇게 많이 든다며.” (우리 애들은 주로 집에서 놀아요.)
“대학 나온 언니가 이런 일 할 때 안쓰러워.”(대학 할애비를 나와도 집에서 맨날 하는 일인데요.)
내가 하는 일이 부끄러운가, 갑자기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일을 하는 내가 부끄러운가, 도 생각해 보았다.
내가 하는 일의 가치와 의미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나?
남이 내가 하는 일을 부끄럽다 여길 때, 나는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하지?
off
알바에 안 간 이틀. 쉬니까 좋다. 식구들 밥하기, 책 읽기, 등 펴기
오늘 들은 좋은 말 3
나와, 나와, 내가 할게.
지각
시간당 임금이 같으니, 나이 불문하고 나와 타인의 시간을 같은 값으로 인식하나 보다. 교대시간에 시간을 어기지 말자. 버스 시간 핑계로 2분 늦느니 20분 빨리 가는 게 상대와 나의 마음을 지키는 매너인 것 같다.
말 뜻
수치의 반대편에 떠오르는 말의 뜻을 찾아보았다.
1. 명예롭다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인정되는 이름이나 자랑. 또는 그런 존엄이나 품위
2. 존엄 尊嚴
인물이나 지위 따위가 감히 범할 수 없을 정도로 높고 엄숙함
3. 품위 品位
-직품(職品)과 직위를 아울러 이르는 말
-명사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위엄이나 기품
존엄과 품위가 있으려면 고유한 일이 있어야겠다는 추정이 든다. 고유한 일은 이타적인 성격을 지닐테다. 그런데,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노동은 결국엔 다 이타적인 거 아닌가.
내가 나를 대하듯이
소고기 토마토 스튜를 싸 가서 언니들과 함께 먹었다. 내가 할 줄 아는 좋은 음식을 나누어 먹으니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견돈생심
월말에 받을 돈을 계산해 봤다. 퇴근길에 핸드폰으로 예쁜 신발과 가방을 뒤적거렸다.
에이스
포스, 키오스크, 쿠팡앱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라,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에이스로 등극했다. 앱 한정 에이스지만.
위기
대책 없이 끼어드는 배달앱 때문에 정말 정신이 없다.
노련미
왕년에 음식점 사장님이었던 언니, ‘난 안 해 본 일 없어.’하고 말문을 떼는 큰언니들이 위기마다 보이지 않는 마법의 호리병을 꺼내는 것 같다. 현장 손님, 전화주문, 배달앱 독촉이 밀려들고, 주문이 쌓이고 엉켜 버릴 때, 당황해서 주문서의 글자도 눈에 안 들어올 때, 언니들은 손님들을 상대하고 주문을 정비하고 역할을 새로 나누어 위기를 넘게 해 준다.
시급 12,000원의 영향
김밥집 알바를 하기 전까지, 내 주변에 나이 많은 여자들이란 어릴 땐 엄마, 사회에선 선배, 결혼해선 집안 어른, 아이를 키우면서는 이미 자식들을 키워낸 동네 언니들이었다. 먼저 산 여자들은 금언이나 예언처럼 ‘삶은 이러이러하다.’, ‘그러니 이러이러하게 하려무나.’ 하는 이야기들을 했고, 그건 애정처럼 들려서 열심히 따랐다. 그런데 김밥집 ‘언니’들은 좀 다르다. 충,조,평,판이 없달까. 열 살 스무 살 위여도 그렇다. 모두가 한 시간마다 12,000을 받기로 한 약속은, 살아온 삶이 다른들, 이 시간만큼은 그 차이를 제껴 놓자고 새 규칙을 꺼내는 걸 수도 있겠다.
나이 차이보다는, 키가 크면 높은 곳 물건을 내리고, 말씨가 예쁘면 화난 손님을 달래고, 지긋한 왕언니는 재촉하는 손님의 시계를 늦추고, 기계를 먼저 익힌 어린 사람은 키오스크와 배달앱을 맡고, 손 빠른 사람은 주문량을 채워내는 차이들이 꺼내어진다. 승진이나 서열 없는 최저시급 부엌의 규범은 장유유서보다는 상부상조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