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과 노동
분업과 통증
‘김밥대 이모님 구함’, ‘뒷주방 이모님 구함’ 두 구인 광고의 행간은 이미 그 일에 필요한 특정 근육을 콕 집어 겨냥하고 있었다. 김밥대를 맡은 내 몸은 날이 갈수록 아픈 데만 계속 아프고 만다. 손이 빌 때 다른 근육을 쓰는 남의 일을 같이하면 내 일의 통증도 덜고 남의 통증도 덜 수 있다.
하는 얘기
언니들은 여행 가고 싶은 얘기, 눈썹 문신 어디서 했냐는 얘기, 돌아가신 엄마 얘기, 김장하고 남은 무 배추로 뭐 해 먹냔 얘기, 동생네 잔치한 얘기, 요즘 들은 신조어 얘기, 병원 간 얘기들을 한다. 나도 재미난 이야기를 해야 하나 싶은데, 시도할 때마다 헛스윙이다. 들어주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실수-주문서 중복
주문서를 보고 김밥을 만든 후 떼어내야 하는데, 수다를 떨다가 기억이 리셋되는 바람에 한 번 더 만들었다. 사장이 화를 냈다. 욕도 먹고 김밥도 먹어야지 뭐.
수다의 기능
노동요를 대신할 수다만 떨어야 하는데 깊은 대화로 새어 버리는 바람에 일어난 실수다. 김밥 마는 일은 안 어려운데, 노동요에서 그치는 경계를 알아차리는 기술이 어렵다. 네이버에서 맛집 검색을 하다가 음식 만드는 사람이 수다를 떨고 있어서 별점을 뺏다는 리뷰를 종종 보곤 했다. 마스크를 안 썼다면 매우 수긍이 간다. 그런데 막상 안쪽에 들어와 보니 가스불 쓰는 부엌에서 머릿속이 멍해지고 몸이 무거워지기 쉽상이라 이야기를 해서라도 ‘환기’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 다 사정이 있다고.
내가 기계를 대신할 때
무경력자로 김밥집에 일하러 갈 수 있었던 이유는, 기계를 들인 매장이어서다. 김밥을 마는 나의 양옆으로 밥을 까는 기계와 김밥을 써는 기계가 있다. 그러니 속재료를 얹고 말아 쥐는 것까지만 하면 된다. 편의점이나 마트의 냉동 김밥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역할도 이미 기계화는 이루어졌다. 그런데 동네 김밥집에는 단골손님의 취향이란 게 있다. 레시피에서 변수가 생긴다. 속재료의 조합과 물성이 바뀌면 말아쥐는 요령도 달라지므로 이 부분을 사람이 조절한다.
김밥집에서 기계화를 가르는 것은, 노동의 하찮음이나 반복의 정도가 아니라 가까이 사는 누군가가 얼마나 사소한 일을 일관되게 욕망하느냐에 달린 것 같다. ‘청양고추참치김밥’(한 단어다.)에 메뉴에는 없는 생와사비를 곁들이고, 심지어는 야채가 하나도 안 들어간 기본 김밥을 만들어 달라고 한다. 기본 김밥은 야채 김밥인데. 오랜 시간 정련된 취향을 지키고, 이를 두 번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익숙함을 찾아서 사람들은 김밥 한 줄에 돈을 더 내고, 더 멀리 찾아가서, 더 오래 기다린다.
나만해도 라떼에 올려진 라떼 아트가 일정하지 않은 카페를 찾아서 나뭇잎 모양을 보고 그날의 행운을 점친다던가, 업종과 무관한 집기들이 인테리어를 채우는 가게를 알게 되면(분식집에 퀼트, 초밥집에 피아노, 샤브샤브집에 캘리그라피 처럼) 그 엉뚱함에 자주 올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사람마다 안온함과 만족을 느끼는 틈새들은 얼마나 다양한가. 그러니 속재료의 가짓수만큼 경우의 수가 많아지는 사람의 취향을 쫓아 김밥대 한 자리만큼은 내게로 왔다.
차라리 기계가 나을 것 같을 때
참치, 김치참치, 고추참치, 묵은지매운참치가 각각의 메뉴로 팔리는 김밥집에서 실수 없이 주문을 만들려면 ‘김치 넣으면 맛살 빼고’, ‘소스 뿌릴 때 고추 넣었나 반드시 확인’, ‘묵은지 올라갈 땐 단무지 없어야지.’처럼 조건을 암기해 두고 몸동작의 순서도 대강 그려놓는다. 생각 없이 외우는 구구단, 저절로 나오는 국민체조 다음 동작 같다.
그런데 해사한 얼굴의 손님이 조용히 다가와 “제가 주문한 묵은지매운참치에는 매운참치 말고 그냥 참치를 넣어주세요.”한다. 아, 듣기평가도 아닌데 왜 못 알아듣나. 두 번을 잘 못 싸고, 세 번째 김밥에서야 몸이 외운 것을 잠시 꺼두고 주문대로 만들 수 있었다.
좀 힘들 때
남의 일 자꾸 지적하는 사람과 일 못 하는 사람 사이에 끼어서 김밥을 말 때
안 힘들 때
사장님한테는 ‘네, 안 해 봤는데 가르쳐 주세요.’ 손님한테는 ‘네, 됩니다.’ 답하는 사람과 일할 때. 일은 많아야 김밥 좀 더 마는 거고, 어려워야 현금영수증 끊는 일이라(요즘 현금 쓰는 사람이 없어서 발급할 때 마다 새롭다.), 긍정적인 씩씩한 사람과 일할 때 시간이 잘 간다.
바쁜 게 낫지
한가할 때보다 바쁠 때가 나은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사장 눈치 볼 일이 준다. 손이 비면 좁은 부엌에서 초조해지는 모두가(사장도 알바도) 없던 일을 만들고 싶어진다. 짐정리나 묵은 때 닦기 같은 안 하던 일을 한다. 그러면 아무래도 작게 조각난 일 하나하나에 사장 뒤꽁무니를 따르며 ‘네, 네, 사장님’을 무수히 반복하게 되는데, 다음에 또 할 일 처럼 보이질 않아서 별 화이팅이 생기질 않는다. 그럴 땐, ‘네, 네.’는 알바의 숨쉬기 운동이려니 한다.
둘째는 대화를 적절히 삼갈 수 있다. 노동에 따르는 침묵은 타인과의 사이에 부드러운 접촉과 협력을 만들어 준다. 공백을 채우려 꺼내놓는 자기 자랑 셔틀콕을 받아칠지 말지 고민하는 순간보다 여념이 없어서 낫다. 바쁠 때 손이 빨라지는 옆 사람은 누구든 사랑스러워 보이게 마련이니, 잘 안 맞는 사람과 일 할 때만큼은 쿠팡과 배민이 주문을 비처럼 내려주면 좋겠다.
손님
노인정 할머니들이 새 점심 메뉴를 찾아 김밥집에 오셨다. 기본 김밥으로 열 한 줄을 주문하셨다. 아마 지원금 카드를 공평히 쓰느라, 참치, 햄, 불고기, 치즈처럼 몇백 원 차이를 내는 취향은 고려하지 않는 룰이 있나보다. 테이크아웃 매장이라 김밥을 싸는 동안 앉아 기다릴 곳이 없어 간이 의자를 내어드렸다.
나: 빨리 싸 드릴게요.
할머니: 천천히 해요.
다음 손님: 많이 기다려야 되나요?
나: 앞 주문이 많아서 좀 기다리셔야 해요. 한 10분?
다음 손님: 괜찮아요. 제가 싸도 10분이에요.
할머니: 이 손님 먼저 줘요.
오늘 손님들은 여유롭고 다정하다. 천천히 하라는 할머니 세 분과 더 기다려도 좋다는 손님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니, 스피드에 맘 졸이던 일터가 잠시 사랑방 같다. 요 근방 가게들 어디가 친절하냐에 대한 얘기인데, 김밥에 곁들일 콜라 한 병을 사러 가는데 좀 멀더라도 더 친절한 슈퍼에 가야 한단다. 할머니들은 콜라 사러 나서는 친구에게 ‘거기 친절해.’란 말을 세 번 되뇌였다. 세 번이면, 딴 데는 가지 말라는 얘기지.
느릿하고 무거운 걸음으로도 가까운 곳보다 친절한 가게를 찾아갈 만큼. 어른이 되어 알게 되는 가치 중에는 친절이 있나 보다. 프랜차이즈 김밥집 알바인 나는 본사의 지침대로만 만들뿐이니 ‘더 맛있게’도 안되고, 키오스크가 찍어주는 순서대로 만드니 ‘더 빠르게’도 안된다. 그런데 ‘더 친절하게’는 할 수 있다.
내가 쓸 수 있는 기회도 친절뿐이니, 할머니들이 소중히 여겨주는 게 다행스럽다.
점심
오늘은 선애 언니와 사장님하고만 일하는 날이다. 점심거리를 싸갔다. 시장에 동초가 나왔길래 냉장고 야채를 더해 비빔밥 재료를 만들었다. 매실 고추장도 가져갔다. 선애 언니가 자꾸 ‘건강한 맛’이라고 한다.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니까 번역하면 ‘맛없다.’인지도 모르겠다. 내 입엔 다 맛있어서 고쳐볼 방도는 없다.
실수-소금
밥 한 솥에 정해진 소금량이 있는데 그보다 적게 넣었다가 사장에게 야단을 맞았다. 뭐 큰일인가 싶지만 김밥 담당에게 결정적 실수란 그런 것이다. 분식 담당 언니는 양념 없는 쫄면을 내보낸 적이 있다며 나를 위로해 줬다. 빨간 양념 없이 쫄면만 받은 손님의 젓가락이 허공에 멈춘 상상을 하면 정말 위로가 된다. 언니 고마워.
절제
몸을 담그고 일한다는 건 신기한 효과가 있다. 난 사장도 아니고 책임을 맡는다고 승진하는 것도 아닌데, 연휴 끝에 오픈하는 날 재료 준비가 걱정이다. 빨리 출근하고 싶은 걸 참는다. 난 알바니까.
2개월 차 적응과 부적응
적응
7시간 서서 일하는 것
물 마실 틈을 놓치는 것
구부정하고 고개 숙인 자세
나쁜 공기
부적응
속옷까지 밴 음식 냄새
오금이 터질 것 같은 느낌
퇴근하고 물컵을 못 드는 손목
다음날 두통이 오는 것
사람과 분업화
자꾸 김밥 속을 빠트리고 싸는 언니가 있다. 자의와 타의가 뒤섞인 듯 그만두는 마지막 날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로 가족을 돌본 얘기다. 동생네 조카 손주도 보러 가고, 친정 식구 김장도 해 준다고. 동생들이 내 음식을 좋아해서 부탁을 해 온다고. 그녀가 부엌 밖의 세상에서 얼마만큼의 포용과 지지를 지닌 사람인지 드러낸 그때, 몰리는 주문에 이런저런 일을 기민하게 나누는 소통이 제일 잘 이루어졌다. 프랜차이즈 음식점 주방의 분업 시스템은 그녀의 가치를 작게 조각내었던 걸까? 그게 힘들었던 걸까? 일하다 한숨 쉬고, 주문 여러 개 들어오면 자기가 말고 싶은 거 부터 말아서 모두가 헷갈리게 되고, 종종 손 놓고, 밥 먹자 그러면 살 뺀다 그러던 안 맞는 언니 한 명이 나갔다.
아프니까 사장이다
‘아프니까 사장이다’라는 네이버 카페가 있다. 사장은 일하다 어려우면 종종 거기 들어가 질문도 하고 내용도 살펴본다. 손님은 언제 뜸한지, 어떻게 하면 일을 줄일지, 김밥 옆구리는 왜 터지는지, (내게 말은 안 하지만) 알바가 얹어 주는 고민은 어떻게 해결할지도 물어보겠다.
알바 입장에선 장사 안된 날 까칠한 사장님보다 더 힘든 게 배달앱인데, 이게 남의 사정도 모르고 이래라 저래라 해서다. 오픈 시간이 되면 ‘이제 장사를 시작할 시간입니다!’ 명령하고, 주문이 들어오면 음식이 완성될 시간을 배달앱이 지정한 보기 안에서만 고르도록 해 놓았다. 자칫 제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넘기면 ‘고객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음식을 완성하세요.’ 하는 로봇의 독촉 전화가 온다. 화답이 필요 없으니 받으나 마나 한 전화인데 안 받으면 오토매틱하게 감점이 된단다. 지금 여기에선 사람이 열불 나게 움직이고 있는데, 저 어플리케이션 넘어, 내 움직임도, 내가 만드는 음식도, 가게에서 기다리는 손님도 모르는 프로그래머가 설계해 둔 과거로부터 쫓기는 셈이다. 그 사람도 지금 여기 나처럼 출근해서 해야 할 일이니까 했겠지만, 그렇지만, 너네 사장은, 너네 사장도 아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