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시간
일 할 땐 힘든 줄 모르다가 집에 오면 뻗고 만다. 샤워하고 잠깐 눕는다는 게,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이튿날까지 자 버린다. 다음날 눈을 뜨면 손끝부터 손목까지 모든 관절이 욱신욱신한데 이틀을 공들여 휴식하면 좀 낫다. 재료 준비하는 뒷주방 언니는 종종 목에서부터 손등까지 파스를 붙인다. 전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작은 관절과 힘줄들이 왕왕 성을 내는 것 같다. 쌀 씻고, 그릇 부수고, 냄비 닦고, 후라이팬 들고, 채소 썰고, 김밥 마는 티끌 같은 노동도 휴식 없이 일곱 시간을 모으면 태산 같은 과로가 되나 보다.
기술
“난 기술이 없어서 아무 일이나 하는 거야.”
왕언니가 그렇게 말해도 나는 부엌 언니들의 기술을 좋아한다. 서른 살 훌쩍 어린 젊은 사장 비위도 잘 맞춘다. 매상 따라 오락가락하는 그의 멘탈도 다독여 준다. 오전 오후 제각각인 알바 시간표에 따라 요일마다 다른 팀웍을 이뤄야 하는데, 언니들은 기민하고 조용하게 사람들 사이 일할 기운을 불어 넣는다. 냉장고 재고는 한 눈에 빠삭해서 손님 느슨한 틈틈이 재료 장만 업무를 끼워 넣는다. 그러다 분식 주문이 몰리면 즉시 작업 거리를 치우고 냄비 두 세 개를 동시에 다루는 태세로 전환한다. 네 평 남짓 움직임의 공간에 각자의 칼날과 화구가 번뜩이는데, 일의 순서를 차근차근 놓아가며 안전하게 업무를 풀어간다.
스마트폰에 손가락만 대면 초 단위로 욕구가 해결되는 시대라, ‘즉석김밥집’은 이제 충분히 느린 김밥집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손님들은 주문을 마치자마자 얼마나 걸리냐고 묻는데, 초조하고 지루할 손님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도 언니들의 기술이다. 오늘 걸친 악세서리 칭찬, 가게 문 밖에 강아지 안부, 간혹 동료 알바의 실수를 대신한 사과까지. 신나거나 다정하거나 진중하게 말을 건넨다.
틈을 봐서 환기구를 닦고, 시든 채소 가려내고, 모자란 식재료를 사러 달려 나가고, 막간에 들려주는 시간의 농도 담은 이야기로 주방일에 여가를 준다. 스스로를 혹은 타인을 살아가도록 도와 살아온 기술이다. 본사의 매뉴얼과 사장의 업무 분장이 시시콜콜 길어진다 한들 알잘딱깔센 언니들 손바닥 안이다.
언니들이 스스로를 ‘기술이 없다’고 말하는 뒤에 딱 맞는 대답을 갖다 붙이지 못하고 듣고만 있는 내가 답답하다.
컨베이어벨트
엄마 한 사람이 마술봉을 휘두르듯 온갖 일을 해치우던 부엌은 진진하고 요란했다. 그러고선 결국 한 끼, 한 줄을 위한 김밥이 놓인다. 황당에 가까운 엔딩으로 보아 차라리 유머 섞인 공연에 가깝다. 배는 이미 부르고 미끄덩한 시금치나 단무지의 센 맛이 싫은데도 식탁을 떠나지 못하고 자꾸자꾸 먹는 까닭은, 이 부엌이 내일은 안 차려질 거라 그렇다. 나를 위해 불사하는 비효율과 유한함은 없던 입맛을 부르고 꽉 찬 배가 한 번 더 늘어나게 해 준다.
한편, 컨베이어벨트의 형태를 빌어 쉬지 않고 주문을 받아내는, 내일도 계속될 김밥집 ‘김밥대’는 다른 역할을 한다. 이 공정으로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게 김밥이던 곰인형이던 상관은 없겠지만, 모듈화되고 반복되는 업무라서 누구나 큰 에너지 없이 생산에 참여할 수 있다. 엄마의 부엌 김밥과는 반대로 적은 열정을 쏟는 덕에 많이 생산할 수 있다. 종업식 하는 인근 중학교에 오십 줄, 성가 연습하는 교회 성가대원들에게 백 줄. 컨베이어벨트 위의 분절된 무심함은 다른 필요를 위한 방법이 된다.
김밥 옆구리가 터지면
김밥대에 브레이크가 걸린다. 마지막 자리에 있던 사람이 시작점으로 와서 김을 가져다 터진 자리에 맞게 가위로 오린 후, 찹쌀 풀을 발라 조심스레 붙인다. 이걸 ‘수술’이라고 부른다.
감기
오늘은 일하기가 싫었다. 서 있기가 힘드니 언니들의 노동요를 듣기도 벅찼다. 왕언니가 바닥에 엎드려 뜰채로 수챗구멍을 치우는데 가만 앉아 있었다. ‘이래도 되나.’싶었는데 언니는 “일어나지 마. 이건 내 일이야.” 한다. 마음을 읽혔네.
밥벌이
“길에 나가 김밥을 말아도 네 탓은 안 할 테니, 너도 남 탓 말고 네 할 일을 똑바로 하렴!”
장담에 으름장, 협박과 무지, 오만에다 성질 한 꼬집을 넣어 15년 전 뱉은 내 말을 만나러 일을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새벽이 오기도 전 옆에 누운 네 등이 보이면 너무 안됐다. 매일 출근하면서 그중에 가고 싶은 날, 몸이 벌떡 일어나지는 날이 며칠이나 되겠나. 가족 도움 받아서 길어진 가방끈을 월급 주는 회사에 스스로 묶어 둔 듯 매일 출근하는 너. 그걸 삶으로 받아들인 하루의 새벽과 밤에나 우린 서로 얼굴 보는 사이가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징징대던 너한테 좀 더 따뜻할 걸 그랬다. 아무것도 아닌 채로 좀 더 지내도 좋을 것 같다고 말이라도 그렇게 할 걸. 남의 주방에서 사장 비위 맞추다 고개가 시계로 절로 갈 때 너는 이 시간 무얼 견디고 있을까 생각이 난다.
동료
오전 뒷주방을 맡은 언니는 있는 재료에 한두 가지 장을 봐서 꼭 오전팀 점심을 차려준다. 알바비에 점심값도 더해 받지만, 손님 오는대로 일이 정해지는 식당 주방에서 점심시간이라고 나가 밥을 먹고 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저 겨를을 보았다가 후닥닥 끼니를 해치우는 요령만이 살길이다. 요령에 재주가 더해지면 더 없이 빛이 나는 법. 손맛 좋은 언니는 쫄면에 들어갈 콩나물 데친 국물을 버리지 않고 뒀다가 집에서 챙겨온 김장 김치를 넣고 김칫국을 끓여주고, 어느 날은 두부 한 모 사다가 된장 짜글이를 해 준다. 햄치즈 김밥 재료로 어릴 때 먹던 맛의 볶음밥을 해 줄 때도 있다.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들은 기나긴 메뉴 목록에서 무얼 먹을지 잘도 고르건만 그 재료를 다 쟁여둔 주방 안 사람들은 열한 시쯤 되면 ‘오늘 뭐 먹지?’를 되뇐다. 메뉴판엔 없는 일하는 사람 밥. 답이 없는 것 같은데도 사장 눈치와 알바 인심 사이에서 매일 한 상은 생겨난다. 내 역할 아니니 모른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인데, 틈을 봐서 재료 봐서 동료들을 챙겨 먹여주는 언니가 고맙다.
시험
사장이 늦게 나와 해 놓은 일의 시비를 가리는 질문을 시작하면 평심이 묘연해진다. 잘못 해 놓은 일을 그제야 알아챌 때도 있고, 아예 기억나지 않아 사과조차 못 할 때도 있고, ‘제가 그런 거 아닌데요.’ 말인즉슨 ‘저 언니가 잘못했대요.’ 될 때가 있다. 제일 찜찜한 기분은 세번째 경우에 든다. 이 나이에 저 나이 언니 고자질하지 않게 해 주세요, 아멘.
맞춰가기
새로 온 언니의 신고식 같은 이야기 마당이 끝났다. 옛 시절 자랑이 적절히 깔린 마당이다. 인생 한 바퀴 돌았으니 이제 김발 위에 여념 없이 구를 차례. Rock’n Roll! 합을 맞춰 일할 맛을 찾아보자. 언니가 잘하고 주저하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느리고 빠른, 눈에 보이지 않는 모서리를 감각한다. 나의 잘하고 주저하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느리고 빠른 구석과 맞는지 대어 본다.
언니는 김밥 마는 속도가 빠르고 배달앱 다루는 포스기를 꺼리고 전직 사장님 포스로 주문 착오에 능숙하게 대처하는데, 부엌 마감엔 느긋하다. 언니의 빠른 손을 믿고 포스기를 차근차근 다루고 배달 포장은 더 꼼꼼히 한다. 잘못 나간 주문을 어찌할지 언니 판단에 먼저 묻는다. 언니는 손님 없는 틈틈이 핸드폰 열어 손주 자랑을 보여준다. 언니나 나나 흥이 없는 사람들이라 이런 자랑은 귀여워서 좋다. 빠른 퇴근을 위해 틈틈이 뒷주방 정리 쪽으로 손을 뻗는다. 이렇게 저렇게 합이 맞았을까.
마지막 날 언니의 말, “나 기혜씨랑 일하는 거 좋았는데.”
나도 좋았다. 세상 많이 살아 본 언니의 그저 인사말이었을지라도.
유리창 안쪽
알바에 지원할 때, 그동안 가보지 않은 노동의 자리가 되어보고 싶었다. 일터로 나설 때마다 오늘의 경험을 관찰하겠다는 의지를 품었는데, 그런 각오는 민첩해야 할 주방에서 몸의 반응을 둔하게 했다. 생각은 납작 구겨 넣어 버렸다. 출근하는 대로 기계적인 순서에 따라 오픈 준비를 마치고, 출근하는 동료를 맞이하고, 서로의 말(수다와 지시)에 집중하고, 몸짓의 뜻을 알아맞히고, 일을 나누고, 웃고, 점심 뭐 먹을까 고민하고, 오늘의 수고에 대해 인사하면 하루가 갔다.
세상 어디와도 별다를 게 없어서 내가 유리창 저쪽에 대해 모른다고 여겼던 자체가 한심했달까. 우린 일하며 싫은 소리 듣기 싫고, 기여하고 싶고, 노동의 피로와 위험을 함께 느끼고, 일터 밖에는 소중히 돌보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다. 같을 만큼 같고 다른 데서 다르다. 싫든 좋든 함께 잘 지낼 방법을 고민해 보는 사이다.
그리고. 유리창 안은 야무지게 바빠서 고개 들 새가 없다. 유리창 아니라 벽이라도 상관없고 벽 아니라 화면이라도 시선을 둘 수가 없으니, 안에서 바삐 일하는 사람에게 유리창은 별 의미가 없었다.
종료
이제 일을 그만 둔다. 저녁 주방 담당이던 왕언니도 함께다. 둘 다 후임자가 알맞은 때에 구해져서 다행이다. 왕언니와의 마지막 날, 다른 김밥집 김밥과 달달한 디져트를 사다가 주방 작업대에 둘러서서 쫑파티를 대신할 저녁 식사를 했다. 밖에서 사 온 음식을 먹으니 외식 아닌 외식 느낌이다.
“아니, 김밥집 주방에서 웬 또 김밥이야!”
“언니, 김밥 좋아하신다면서요! 매일 똑같은 김밥만 드실 순 없잖아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밥
대한민국에 김밥 안 먹어본 이 없고, 나와 언니들 중엔 김밥 안 싸본 사람이 없다. 그러니 우리가 모여 일하는 김밥집 주방엔 다 나름의 김밥에 대한 확고한 기준과 향수가 있다. 다만, 정해진 메뉴얼에서 여지가 1도 없는 김밥을 마느라 손으로는 실현을 못하고 각자 입으로만 만든다.
“계란 지단 바로 부쳐서 싼 김밥은 얼마나 꼬숩고 맛있나 몰라.”
“우엉, 들쩍지근 한 거 말고 살캉하고 씹히는 맛. 그 맛이 좋은데.”
“우리 가게 김밥 간이 좀 짜지 않아? 밥은 좀 슴슴해도 돼.”
“여러 가지 들어간 거 말고, 속 몇 개만 넣어서 얇게. 그게 더 맛있어.”
일하면서 남들이 그려주는 김밥 맛을 상상한다.
“내가 만들어 줄게, 이따 우리 저녁으로 먹어보자.”
손님 뜸한 시간, 있어야 할 건 다 있는 주방의 재료들로 각자가 확신하는 김밥을 만들어 보는데, 어째 그때마다 반응은 하나같이 시들했다.
“그 맛이 안 나네.”
“그 맛이 안 나지?”
“오리지날이 제일 맛있나 봐.”
“메뉴 개발하는 사람들이 오죽 알아서 했겠어.”
“그러게, 별로다.”
일을 그만두고 빈 시간에 언니들이 들려준 ‘최고 맛있는 김밥’의 조합을 떠올려 보았다. 계란 지단 바로 부쳐 슴슴한 백미밥에 살캉한 채소를 넣어준다는 리뷰가 적힌 김밥집을 찾아갔다. 재료 준비하는 부엌도, 김밥 말아 내어주는 시스템도 내가 일한 곳과 비슷하다. 당근 채에 치이고 참기름 냄새에 쩔고 갓 지은 밥에 데어 보아서 그런지 맛도 그럭저럭 예상이 되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한 알 빼어 먹는 순간, 이거 왜 이렇게 맛있는 걸까!
언니들, 진짜 맛있는 김밥 찾았어요. 그건 남이 싸 준 김밥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