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과 노동
김밥집에 일하러 갈 때 알바 위에 사장이 있는 줄은 알고 갔는데 사장 위에 배달앱이 있는 줄은 몰랐다. 다분히 아날로그적인 시선에 닿은 대로 가게에서 아이 마냥 기다리는 사람에게 음식을 건네는 일, 그러니까 내 엄마의 것이었고, 다수의 여자들의 것이었고, 집 안에서는 귀했으나 시스템 안에서는 허다해진 노동이 되어보고 싶었다. 그래야 ‘간단히 김밥 한 줄’에 대해서 온전한 생각을 굴려볼 수 있을 듯 했다.
분업과 부속의 자리인 것은 예상했으나, 배달앱 알람이 울리는 순간 나의 노동은 한 번 더 기계화되고 만다. 느닷없이, 혹은 가게에 선 손님을 제치고 앱 주문이 쌓이면 머릿속엔 앱이 정한 제한 시간이 시한폭탄처럼 작동한다. 40분, 째깍째깍, 25분 째깍째깍. 여지없는 기계의 명령인데 눈앞에 기다리는 손님들과 손님들은 모르는 일의 순서를 재는 일은 여전히 사람 몫이다. 제한된 시간 안에 또 울릴지 모르는 알람과 언제 들어설지 모르는 새 손님을 예상하면 초조해지고, 생각 따위 닥치고, 코를 박고 말아댄다. 사정없는 주문을 쳐내면서 비로소 눈에 드는 단어가 생겼다. ‘플랫폼노동’. 디지털 플랫폼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노동을 일컫는다. 김밥집 사장과 고용계약을 맺은 나는 플랫폼 종사자로 분류되지 않는데도, 가게에 배달앱 서비스를 들이고 사람들이 각자의 폰에서 우리 가게 이름을 터치하면, 안쪽의 사람들은 플랫폼 노동자가 된다. 이를 새삼 온디멘드 노동(on-demand work)이라 부른단다.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즉각 제공하는 서비스를 표현한다.
“엄마, 오늘 밥 뭐야?”에서부터 김밥 가게로 찾아온 손님들까지 나의 노동이 온디멘드가 아니었던 적이 없는데, 이 초조와 무리는 어디서 날까. 서로를 보지 못한 채 각자 쏘아 올린 요구는 쌓여서 무제한이 되고, 앱사용 만족도를 높이도록 시간은 자동 설정되어 있다. 알량하게 남은 시간에 매달리는 동안 친절 같은 건 떠오르지 않는다. 음식을 내는 의미를 잊은 상태에 무감각해지다가 점점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무엇이던 끝내야 끝난다는 생각만 남는다. 마지막 김밥쯤은 집어 던지게 될지도 모른다. 일과 사물과 인격의 분리는 이렇게 일어나는구나. 플랫폼노동에서 수요자는 고객, 플랫폼은 운영자, 공급자는 서비스제공자라는데, 배달앱은 알바의 시간을 가져다 편의라고 이름을 붙여 손님에게 전한다. 손님은 편의를 고른 대가로 배달앱에 돈을 낸다. 가게 사장은 손님을 연결해 준 값으로 배달앱에 수수료를 낸다. 가게는 결국 손님에게 가격을 올린다. 분명 좋은 아이디어로 보였는데 작동하고 보니 왜 이러고 있나 싶은 이상한 구조다.
김밥집에서 일한 이후로 배달앱을 차마 누르지 못했다. 내 엄지손가락 아래에서 동동거릴 누군가가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새벽배송은 누른다. 김밥집에서 일하느라 침대에 뻗어버렸으니까. 쓰으윽-. 이튿날 새벽 현관문 밖 박스 바닥 쓸리는 소리에 일어나 배송된 짐을 들여온다. 사람이 붙였을 바코드 스티커를 김밥 싸다 관절이 부은 손으로 긁어 뜯어낸다. 플랫폼이 가려버린 사람끼리 만나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