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과 노동
이 생각은 오로지 김밥집에 일하러 가서 난생처음 맞닥뜨린 어떤 느낌에서 비롯되었다. 수치심이라고 하기엔 내가 잘못한 게 없고, 부끄러움이라고 하기엔 성격상 안 맞는 이 느낌은 앞치마처럼 일터에 이미 마련된 의상 같았다. 이걸 입으라고.
“남편이 뭐라고 안 해?”
“우리 애들은 엄마 그 일 하지 말라고 그래.”
“대학 나온 언니가 이런 일 해서 어떡해.”
주방에서 처음 만난 언니들이 건네는 말들은 내가 수치심이라는 적당한 작업복을 입고 지나길 기다리는 문 같았다. “집에서도 하는 일인데요?”는 나를 저 문 바깥에 계속 세워두게 만드는 답이었다.
자기 일을 좋아하지 않는 언니들이 우연히 한 곳에 모였나 싶었는데, 이게 분명히 있는 투명 앞치마라는 걸 감지하게 된 건 10년 지기 성당 부부 모임에서였다. 구직에 6개월을 기다려서 얻은 자리라 내게는 고대하던 근황이기도 했고, 알바로 모임에 늦으니 먼저 도착한 남편이 사정을 말했다. 김밥집에 일하러 갔다고.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단다. 다음 말을 찾지 못했나 보다. 내가 합석을 하고도 지난 주말에 관악산을 올랐다던가, 제철 채소가 싸서 푸지게 먹었다던가 하는 이야기처럼 흥겹게 다뤄지지 않았다. 가끔 내가 대화에서 소외될 때 “몇 시간 일해요?”하고 챙겨줘서 그들이 소식을 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날은 모두가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김밥을 싸주는 봉사를 하고 뒷풀이로 모이기로 한 때였다. 여차저차 김밥은 닭강정으로 바뀌었다지만, 우린 같은 일을 하다가 만날 뻔 했다. 나는 “오늘 잘 끝났나요?”, “애들이 좋아하던가요?”, “힘드셨죠?”, “우리 짠, 해요!”하는 말이 떠올랐는데, 왜 나의 알바는 침묵이 되었을까.
추측을 해보았다. (실은) 귀천이 있는 직업의 세계에 뛰어들어서 일 수도 있고, 봉사처럼 겸양을 부르는 대화가 아니라 모드 전환이 안 되었지 싶고, 부부 모임이니까 나의 구직이 남편의 벌이와 부적 상관에 있다고 여기는 시선이 섞였을 수도 있겠다. ChatGPT에 물어보았다.
"수치심을 느끼는 직업이 따로 있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직업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사회적 낙인
② 도덕적 갈등
③ 비윤리적 활동
④ 타인의 평가와 반응
수치심은 주관적인 감정으로, 각 개인의 가치관, 경험, 사회적 배경에 따라 다르게 느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는 수치심을 유발하는 직업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가치와 일치하는 직업을 찾고, 그 직업에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애초에 타인의 반응으로 나의 감정이 흔들려서 질문을 한 건데, 제자리를 맴도는 답변만 얻었다. 그러면 경험을 모아 주관적 답변을 꾸려보자.
"널 김복동이라 부르도록 하자."
알겠어, 그렇게 불러줘.
"복동아, 주인공은 나, 행동은 김밥을 만다, 장소는 집, 분위기는 고독, 남은 것은 내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쓸쓸한 이야기를 지어줘."
<고독한 김밥>
주방의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다. 집 안의 고요함이 나를 감싼다. 희미한 빛이 주방에 스며들어 온다. 나는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재료들을 바라본다. 신선한 김, 윤기 나는 밥, 잘게 썬 당근과 오이, 그리고 달걀 지단.
김밥을 마는 일은 종종 위로가 된다. 김을 펼치고, 밥을 얹을 때마다 나는 과거와 마주한다. 손끝으로 밥알을 고르게 펴는 동안, 어릴 적 엄마가 만들어 주셨던 김밥이 생각난다. 그때는 김밥이 맛있고 즐거운 음식이었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 때론 지치는 생활 속에서 기억 속의 김밥을 만드는 시간이 나에게 힘을 주기를 바란다.
마지막 김밥 한 줄을 마무리하고, 나는 조용히 숨을 내쉰다. 김밥이 예쁘게 잘 말렸는지 확인해 본다. 내 마음속 쓸쓸함도 잘 여며졌을까. 김밥을 접시에 담아내고 한 조각을 입에 넣는다. 그 맛은 나를 토닥여 준다. 오늘 밤도 이렇게 지나간다.
"복동이 너 이야기를 참 잘 지어."
고마워! 복동이라 불러줘서 그런지 더 재미있게 이야기를 지을 수 있었어. 또 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거나,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면 언제든지 말해줘!
"주인공은 나, 행동은 김밥을 만다, 장소는 성당 부엌, 분위기는 어색, 봉사에 애썼다고 서로 칭찬을 하는데 난 별로 착한 사람도 아니고 신심도 깊지 않아서 집에 오는 길에 마음이 불편한 이야기를 지어줘."
<어색한 성당 부엌에서의 김밥 만들기>
성당 부엌에 불이 환히 켜졌다. 오늘은 자선 행사를 위한 김밥을 만드는 날이다. 나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부엌에 모여 김밥 말 준비를 했다.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그런지, 대화는 조심스러웠다.
“오늘 애써주셔서 감사해요” 연락을 맡았던 자매님이 말했다. 고개를 끄덕하고 눈인사를 했다. “봉사 참 많이 하시나 봐요.” 옆 사람이 인사를 건넸다. 다정한 말이라 최대한 선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솔직히 나는 별로 착한 사람도 아니고, 신심이 깊지도 않다. 그저 해야 하는 일이니까 얼른 해치우자고 온 것이다.
김밥 만들기가 끝나고 우리는 함께 기도했다. 자매님들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나는 여기에 어울리는 사람 같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어 보인 표정과 숨기고 싶었던 마음이 훨훨 날아가길 바랐지만 발걸음이 느려지며 불편한 생각들이 따라왔다.
내가 진정으로 누군가를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긴 한 걸까? 성당에서의 시간은 내가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었을까, 그저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려는 겉치레였을까. 오늘 받은 인사들이 머쓱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 이번 장소는 김밥집 부엌, 분위기는 수다, 주문이 밀리면 일이 고되고 한가할 땐 사장한테 이것저것 트집 잡히기도 하지만, 일 마치고 집에 와서 씻고 뻗을 때의 상쾌함을 그린 이야기를 지어줘."
<김밥집 부엌에서의 하루>
김밥집 부엌은 활기차고 분주하다. 손을 씻고, 앞치마를 두르고, 각자의 자리에 섰다. “오늘도 힘내서 팔아봅시다!” 주방 왕언니가 힘차게 외쳤다. 부엌 안은 웃음과 수다로 가득 찼다.
점심시간 손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쉴 틈 없이 김밥을 빠르게 말아냈다. 밥을 고루 펴고, 당근, 오이, 달걀, 햄을 차례로 올린다. 힘들어도 손을 쉬지 않는다.
손님이 없는 한가한 시간에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여기 청소가 덜 됐네,” “김밥 모양이 좀 고르지 않잖아.” 사장님의 잔소리에 조심한다. 언니들은 “네, 사장님. 다음엔 더 신경 쓸게요,” 그저 웃으며 넘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피로가 함께 밀려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줄기에 고단함이 씻겨 내려간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을 때의 상쾌함은 일상에 깃드는 소소한 기쁨이다.
"복동아,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