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만난 김밥
제주에는 번영로라는 길이 있다. 제주 북항과 표선 사이를 대각선 방향으로 잇는 가장 넓은 도로다. 이 길을 지나 어젯밤 입도한 등산객들이 한라산엘 가고, 철 따라 하루를 시작하는 날품 일꾼들이 밭에 가고, 밤낚시 배에 오를 어부들이 바다로 나가고, 육지에서 출발해 아침 식사를 거른 골퍼들이 동쪽의 골프장을 간다. 산과 들과 바다에서 이들의 식사가 될 김밥을 번영로 김밥집이 판다. 그래서 제주 도심보다도, 여느 대학가보다도 이른 시간에 문을 연다. 03시 40분 독새기 김밥, 04시 30분 봉자커피, 05시 땡초김밥싱싱왕만두, 05시 30분 만복김밥. 하나같이 어둑한 새벽에 시작하지만 가격은 주인 따라 가지각색이다. 믿기지 않는 가격인 2,000대의 김밥, 앞자리를 유지하고자 주인이 고심했을 3,900원 김밥, 한우나 장어를 넣어 5,000원을 훌쩍 넘긴 김밥도 있다.
정말 이 시간에도 김밥을 살 수 있다니, 네이버에 잘못 적힌 거 아닌가 반신반의하며 반쯤 자고 반쯤 안 잔 상태로 나가본다. 의심이 무안하다. 이미 각종 채소를 들들 볶아 임무를 다한 한아름 둘레의 웍을 싱크대에 툭 걸쳐 놓고 30인분 전기밥솥을 여러 개 거느리고 주문받기와 김밥 싸기를 동시에 해내는 사장님을 만난다. 검푸른 시간에 음식에서 오른 하얀 수증기가 사장님 주위를 감싸 그분 삶의 위용을 더해준다.
쉴새 없는 사장님 어깻짓에 먹여 살릴 누군가가, 새벽 약속을 지키는 번영로의 손님이, 제때 다듬어야 값지게 쓰일 재료의 무더기들이 실린다. 난 그만한 하루를 산 적이 있나, 김밥을 사러 와서는 절로 숙연해진다. 자다 부은 얼굴을 만회할 겸 이미 하루의 절반을 살아냈을 사장님에게 걸맞게 입꼬리를 올리고 목에 힘을 준다.
“사장님, 저 기본 김밥 한 줄이요!”
신새벽이라 목청 옆구리 터지는 소리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