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과 노동
프랜차이즈 김밥 전문점이 엄마 김밥의 맛을 제일 먼저 채어간 서울에만 살다가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김가네’ 맛도 아니고, 내 엄마 맛도 아닌데 영락없이 맛있어 버리는 낯선 김밥들을 만났다. 바다가 한 번 가른 제주에서 아롱이다롱이 상호를 내 건 김밥집 문을 열 때, ‘이 집 김밥은 어떤 맛일까?’ 하는 기대감이 드는데 그건 ‘안에 계신 분은 누굴까?’하는 궁금증과 구별되지를 않는다. 그럴리 없는데도 혹여 반가운 사람을 만날 것 같은 설렘을 닮았다.
주문과 조리를 모두 담당하는 1인 김밥집에 들어서면-선사부터 집의 구조가 그랬다던가-가게 제일 안쪽 깊은 곳에 사장님, 그러니까 음식을 만들어 내는 주인의 자리가 있다. ‘어서 오세요.’ 할 수 있는 자리, 문 열고 들어온 사람이 걸어가 멈춰 서는 자리다. 출입구에서 주방까지 거리를 나의 걸음으로 채우는 동안 주인과 손님의 관계는 명료해진다. 김밥대를 떠나지 않고도 가게 면적만큼은 눈길 한 번에 감싸 안는 사장님의 포지션과 사람을 찾아가 먹을 것을 달라 말하는 나의 동작이 대비되어서다.
90년 초 시발한 프랜차이즈 김밥집이 인테리어로 구현한 집김밥의 역점은 눈앞에서 말아주는 ‘즉석’에 있어서, 주방은 길거리에 면한 앞으로 나왔고 김밥을 싸는 사람을 훤히 내보이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 전략은 이후 수많은 김밥집 브랜딩의 문법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후로 30년이 족히 지나고도 나는 도무지 누군가의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길가의 유리창에 붙어서 김밥을 만드는 가게에 익숙해지질 않는다. 이제는 김밥 한 줄이 먹고 싶을 때, 내 손에는 김발이 아니라 스마트폰이 들려 있다. 주변 검색으로 김밥집 리스트를 띄운 후, 엄지손가락이 동네 김밥집 이름을 고루 터치한다. 먹게 될 김밥이 아른거린다.
눈을 부스스 뜬 채로 부엌으로 향한다, 김밥집 문을 연다.
부엌에 선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사장님이 “어서오세요.” 인사를 한다.
부엌으로 다가간다, 무얼 주문할지 고심하며 한 걸음씩 주방에 가까워진다.
엄마 앞에 앉는다, “사장님, ○○ 김밥 한 줄이요.” 하고 기다린다.
남이 싸 준 김밥이 맛없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입맛을 다시며 다시 찾는 장소는 하나같이 김밥 마는 자리가 가게 제일 안쪽에 자리한다. 집김밥의 감성은, 즉석과 위생의 정도를 내 눈으로 확인하는 권한에서가 아니라, 만드는 이와 먹는 이의 관계가 재연될 때에 불려 나오나 보다. 그러니, 알고리즘과는 다른 나만의 김밥집 검색 조건은 김밥 마는 자리가 안으로 쑤-욱 들어가 있는 가게,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동안 이미 맛있어 버리는 가게다. 아, 그리고 이런 가게에는 배달앱이 울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