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만난 김밥
제주에선 김밥과 무의 조화가 여럿이다. 시중 노란 단무지가 아닌, 손수 만들어 색이 희거나 물들여 붉은 것이 왕왕 있다. 덜 달고 더 사각댄다. 꼬들한 무말랭이를 절여서 채운 집도 있고 직접 만든 생채나 짠지를 포장에 반달 단무지 대신 넣어주기도 하고, 무 몸통 말고 시래기를 넣어 촉촉하고 구수한 맛을 낸 김밥도 있다.
직접 담근 단무지 @ 어멍김밥
하얀 무말랭이 @도주제
무짠지 @한라네김밥
무시래기 @도르르김밥
제주 겨울의 기후와 물이 잘 빠지는 화산토는 달큼한 무를 자라게 한단다. 날이 추워지면 검은 흙 밭고랑에 희고 푸른 무 이마가 빼곡하다. 구불한 밭담을 두른 농부의 마음처럼 무를 손에 쥔 요리사의 마음도 제각각이었을까. 김밥에 들어가는 무는 달디단 하나의 맛이 아니라 꼬들하고 짭짤하고 구수하고 아삭하거나 칼칼한 변주를 툭툭 해낸다. 올레길을 내다보는 동네 구옥에, 이면도로 비집고 주차해야 닿는 가게에, 멀리 가는 큰길 어귀에 자리 잡은 김밥집들이 저마다 자기 맛을 낸다. 노랗고 네모난 단무지 그거 뭐 꼭 김밥에 기본이겠냐는 듯이. 제주의 김밥을 꼭꼭 씹다 보면 김밥이기 이전에 밥상에서 무와 밥의 조화가 이거였지, 싶다.
네 맛 내 맛 자신감은 무맛을 내는 데만 있지 않다. 아예 단무지가 안 들어간 김밥도 있는데, 맛의 중심을 유부가 잡는다. 유부라니. 미소국에 매가리 없이 축 처진 그 유부가 아니다. 볶고 졸이고 물기를 날린 유부는 단무지 없이도 간을 딱 맞춰낸다. 튀겨낸 유부를 넣는 집은 고기 없는 김밥에 윤기와 감칠맛을 더해 기본 김밥으로도 진한 만족을 준다. 어쩐지 다정하다.
볶고 다진 유부(고기인 줄 알았다.) @남춘식당
길게 튀긴 유부(어묵인 줄 알았다.) @대박이네
잘게 튀긴 유부(참깨인 줄 알았다.) @다정이네
생양파가 그대로 씹히는 집도 있다. 이름은 흑돼지 김밥인데 생양파의 뒷맛이 돼지고기 불맛을 이겨서 뒤돌아 생각날 때 알알한 양파맛이 어른거린다. 아는 맛이려니 무심히 먹으려다가 입안에서 전혀 간단하지 않았을 맛의 고민이 감지되면 포춘쿠키 가르듯 신중하게 그 단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돼지고기와 생양파 외에는 직접 만든 흰 단무지, 지단, 고추가 들어갔다. 풀어놓으면 고깃집 상차림도 될 듯 하다. 흔한 조합이 김밥 안에서 이루는 새로운 맛이다.
흑돼지김밥 @봉개 커피
생양파 못지않게 씹는 맛을 내는 붉은양배추를 넣는 집을 만났다. 유행하는 다이어트 김밥도 아니고 햄과 계란이 든 보통 김밥에 들었다. 어린 학생들 많은 주택가 김밥집에서 쓴맛 나는 적채를 넣으면 인기가 있을까 싶은데, 사각사각 씹을수록 갓 지은 밥의 온기로 은은한 단맛을 끌어 올린다. 말 그대로 즉석김밥이라서 가능한 맛인데, 이렇게 맛을 본 아이들 기억에 적채는 쓴맛 아니라 단맛으로 남겠다.
치즈김밥 @ 바로밥 김밥
한라산을 뺑 둘러 마을마다 기후와 토양이 다르고 바다부터 중산간까지 고도와 식생이 제각각인 섬에서는 사계절 곳곳 싱싱한 재료가 난다. 김녕 양파, 구좌 당근, 애월 계란, 오름마다 고사리, 중산간 표고버섯, 여름 바다 한치, 겨울 난 바다의 톳과 다시마.
계란김밥 @까메까메까망이
고사리김밥, 톳김밥 @표선 새로미
표고김밥 @이가네 고가네
한치무침김밥 @한수풀
다시마김밥 @꼬신김밥
이웃과 자연이 키운 작물들이 지천에 널리고 거두어 들여지는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각 재료는 영감을 주는 기운이고, 한 계절을 이끄는 인상이고, 내 손을 거칠 책임에 가깝겠다. 마트 냉장 코너에서 사시사철 똑같은 포장을 집어 드는 나, 프랜차이즈 트럭이 전국 모조리 같은 맛을 내도록 식자재를 부려놓는 가게와는 재료를 떠올리는 시작부터 다른 의미일거다. 그 의미는 김밥 속에 맛으로 표현된다.
또렷한 맛.
계절이 명백한 데서 오고, 자연이 무성한 데서 오고, 사장님 마음에 재료가 자리한 정도에서 오는 또렷한 맛이 제주에서 만난 김밥에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