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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는 인간 Jul 19. 2024

아버지, 지금 뭐 하세요?

여섯 번째 이야기;  세 남자,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나

용건 없이 안부를 묻다.

아버지, 나 그리고 아들. 우리는 서로에게 같은 말로 안부를 묻는다. 용건도 없고 별스럽지도 않다. 자주 주고받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너무 가끔도 아니다. 나는 퇴근길에 전화로 아버지께 묻고, 아들은 집에 가는 길에 카톡으로 내게 묻는다. 나는 그 한마디가 너무 좋다.

“아버지, 지금 뭐 하세요? 그냥 생각나서 연락드렸어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 어디쯤에 서다.

내 삶이 등산이라면 험하고 가파른 코스는 지났다. 그렇다고 정상에 닿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삶의 끝자락에 계시는 아버지와 청춘의 출발선에 있는 아들의 중간 즈음에 내가 있다. 아버지의 큰아들로, 내 아들의 아버지로 두 삶을 동시에 살고 있다. 가끔 되뇌어본다. 아들과 아버지로서 ‘노릇’을 잘 해냈는지? 지금은 잘 해내고 있는지? 딱히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더구나 ‘그렇지’라고 쉽게 답할 수도 없다.


아버지도 세월을 비켜갈 수 없다.

올해로 딱 구순. 아무리 평균수명이 늘어난 요즘이라 해도 구순이면 장수하신 거다. 하지만 아버지의 일상은 치매로 많은 부분이 뒤엉켜 계신다. 결코 평안하지 않은 수고로운 하루를 보내고 계신다. 가끔 찾아뵈는 아버지의 어눌하고 무기력한 모습에서 세월의 야속함을 느낀다. ‘장수라 해서 모든 게 좋은 것만은 아니구나’라는 생각도 든다. 아버지께서 치매라는 의사 소견을 듣던 때의 복잡한 심경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이 구십에 치매가 뭐 그리 생경하냐 하겠지만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바라보는 마음은 생각만큼 이성적이지 않다.


치매, 아버지를 찾다.

작년이다. 아버지께서 집 근처 산책을 나가셨다 연락이 두절되었다. 대여섯 시간이 지나서야 경찰을 대동하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순간 블랙아웃이 되어 당신이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조차 알지 못하셨다. 천행으로 주변을 지나시던 분께서 이상히 여겨 경찰서에 신고를 해주셨다. 출동한 경찰분의 도움으로 무사히 집에 도착하셨던 거다. 이 사건을 계기로 놀란 마음을 부여잡고 근처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진료 결과는 예상대로 치매였다. 좀 더 정확한 진단을 위해 대학병원 신경외과를 찾았다. 하지만 결과는 ‘치매’를 재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지금은 약물치료를 받고 계신다. 진행속도를 조금 더디게 해 준다.


치매, 당사자도 가족도 힘들다.

아버지는 알츠하이머성 치매 진단을 받으셨다. 병원을 오가며 치매를 배웠다. 치매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는 사실도.. 가장 흔한 게 알츠하이머성인데 대부분 가족력으로 유전된다는 것도.. 근본 치료는 불가하고 약물로 속도를 더디게 할 뿐이라는 것도.. 그래서 약물을 잘 찾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까지.. 모든 게 생소했다. CT와 MRI를 통해 확인된 아버지의 뇌는 일반인에 비해 80% 정도였다. 상당 부분이 수축되고 쪼그라들다 보니 인지 기능이 많이 떨어지셨다. 기억력 손상도 심하셨다. 병원 진료실에서 아버지 뇌의 CT 영상을 보면서 느껴지는 감정은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했다.


“아.. 그동안 자식으로서 뭐 했나? 왜 이리 시간을 지체했을까? 평소 아버지의 변화를 눈치챘을 텐데 애써 무관심했던 게 아닐까? 조금만 더 빨리 병원에 모시고 갔더라면 진행속도를 늦출 수 있지 않았을까? 아버지 홀로 얼마나 힘드셨을까?”


수많은 물음표와 이런저런 생각들로 한동안 맘고생을 심하게 앓았던 것 같다. 지금은 현실을 받아들였다. 아버지가 조금이나마 평온한 일상을 사실 수 있도록 살펴드리는 게 전부다. 다행히 병원에서 처방한 약물이 효과가 있었다. 항상은 아니지만 일상의 기억을 유지하며 지내실 수 있게 되었다.


내 열등감의 뿌리, 아버지.

아버지는 여태껏 대부분의 감정을 억압하고 살아오셨다. 자기보다 가족이 항상 최우선이셨고, 억척스러움보다는 우직함이 크셨다. 하지만 사춘기 시절 내게 비친 아버지의 모습은 자기 것을 챙기지 못하는 못난 아비였다. 내 열등감의 뿌리를 찾아가 보면 그 시절 아버지가 내게 비춰준 모습들에 닿는다. 아버지가 심어준 열등감과 그런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은 내 삶에 수많은 흔적을 남겼다. 내 머리가 제법 굵어지고 나서 대학원 연구실 생활 그리고 수많은 대인관계가 얽히는 사회생활을 이어가는 내내 영향을 미쳤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조금씩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정신분석을 통해 들여다본 아버지에 대한 내 감정은 많이 꼬여있었다. 시간이 흘러 꼬였던 감정들도 풀어졌을 거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아버지의 치매를 바라보니 자책감이 나를 뒤흔들었다. 아버지께서 수년 전부터 보이셨던 어눌한 변화를 치매 증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옆으로 슬쩍 미뤄뒀던 것이다. 내 마음속 깊이 ‘아버지는 원래 그러신 분’이라는 무의식적 태도와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으로 여러 차례 검사와 진료를 받으러 다녔다. 여름 즈음 심리검사를 받을 때였다. 아버지는 문답지를 받으시고 적잖이 당황하셨다. 아버지는 학교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 글자도 전혀 모르신다. 심리검사 선생님께 황급히 사정을 설명드리고 편의를 부탁드렸다. 검사실 밖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검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버지가 문득 한마디 하셨다.

“난 평생 일만 했어. 엄니는 나만 학교를 안 보내고, 글도 안 가리키고, 큰집에 보내 일만 죽어라 시키고. 그게 제일 서러워.”


순간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정면을 주시하고 있던 고개를 좌우로 돌릴 수가 없었다. 구십 평생 고단하셨을 아버지의 삶에 목이 메어 눈물만 흘렀다. 세상살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억울한 심경을 얼마나 털어놓고 싶으셨을까? 그러고 보니 치매가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치매가 진행되면 기억이 사라지는 것도 있지만 인지적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 큰 특징이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올라오는 감정을 여과 없이 표출한다. 아버지께서 억눌렀던 감정을 더 이상 담아두지 않고 표출하는 것도 치매 덕분이라니 씁쓸했다. 평생 억눌렀던 감정을 표현하니 주위 사람들이야 불편하고 이상스러울 거다. 하지만 삶의 끝자락에 한을 풀고 가신다 생각하면 오히려 반가울 일이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 들으시라 큰 소리로 할머니 욕을 한 바가지 해드렸다.

“아버지 고생만 시키고. 할머니 참 못된 양반이네. 아버지! 속에 담아둔 억울하고 성질나는 거 또 생각나시면 언제든 나한테 푸셔. 더 이상 담지 말고.”


‘K장남’의 짐을 내려놓다.

나는 흔히 말하는 ‘K장남’이다. 결혼 상대자로 여자들이 싫어하는 캐릭터. 아내의 표현을 빌리자면 바보등신이다. 지나친 책임감으로 세상 온갖 짐들을 스스로 짊어지려 하는 바보. 비대해진 도덕심으로 받는 것보다는 주는 거에 익숙한 등신. 그런 삶이 힘들어 내 아들에게 대물림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물론 의식적으로는 그러했다. 하지만 나는 부지불식간에 아들에게 K장남의 유전자를 심으려 했다. 나 스스로 그토록 싫어했던 과도한 책임감과 비대해진 도덕심을 아들에게 강요했다니. 나는 아니라 부정했지만 아내의 눈에 비친 나는 분명 그러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우리 부부는 어느 한쪽이 심하다 싶으면 개입해 제지한다. 그러면 누구든 거기서 멈춘다. 내가 아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려 하면 아내는 부단히 제지했다. 아내의 제지는 항상 적절했고 옳았다. 아내의 적극적인 제지와 나 스스로 자각의 노력이 필요했다. 아버지에게 받은 영향을 아들에게 그대로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다. 좋은 것은 북돋아주고, 좋지 않은 것은 녹여주고 싶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내 덕분에 큰아들 노릇, 아버지 노릇을 조금은 할 수 있었다.


부모는 자식을 통해 성장한다.

청년이 된 아들은 더 이상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대신, 자기에게 필요한 것들만 걸러서 듣는다. 그래서 참 다행이다. 아들은 삶의 난제에 부딪힐 때면 나에게 먼저 묻는다. 그때마다 나는 정답이 아닌 의견을 말해준다. 그리고 말미에 항상 덧붙인다. 모든 선택과 책임은 네게 있는 것이라고. 내 의견에 수긍이 가면 "당연하죠."하고 답한다. 하지만 내 의견에 수긍이 가지 않거나 뭔가 강요받는다는 느낌이 들면 아들의 답은 단호하다. “아버지. 그건 아버지 생각이구요. 아버지 생각을 저에게 주입하려 하지 마세요.” 나는 아들에게서 이 말을 들을 때 기분이 제일 좋다. 아.. 내 아들이 주체성이 살아 있구나 싶기 때문이다.


‘인생의 진리는 오로지 개인적 삶의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정신치료 전문의 이동식 박사가 지식과 실천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한 말이다. 말은 흩어질 뿐, 오롯이 행동만이 남는다. 반듯한 아버지나 아들은 어느 날 갑자기 툭하고 만들어지지 않는 것 같다. 아들은 아버지의 행동과 삶을 통해 인생을 습득한다. 시나브로 인격이 고스란히 스며든다. 성장한 아들은 몸에 밴 인격을 자기 아들에게 다시 대물림한다. 그러니 반듯한 아들을 바란다면 나 자신의 인격부터 바로 세워야 함을 배웠다. 그저 말은 아무 의미 없고, 오롯이 행동과 삶으로 보여주어야 함을 경험으로 배웠다. 그렇게 내 아버지는 말주변이나 배운 것이 없어도 온 삶을 통해 나를 가르치셨다.


아내가 가끔씩 내게 해주는 말이 있다.

“당신은 아버님께 참 좋은 것을 물려받았어. 성실하고 책임감 넘치는 것. 그리고 자식들에게 다정다감한 것. 그건 당신이 아버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야.”


나는 참 복 받은 사람이다. 이십 년 넘게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삶을 동시에 살아왔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나는 아버지에게 받은 좋은 영향은 아들에게 물려주려 부단히 노력했고, 좋지 않은 영향은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몇 곱절을 더 노력했다. 내게 있어 진정한 효孝는 부모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닌, 부모님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버지를 넘어서기 위해 일생을 들여 노력했다. 그리고 내 아들 역시 나를 넘어서서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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