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읽는 인간 Jul 22. 2024

어머니, 미워할 수 없는 존재

일곱 번째 이야기;  당신을 이해하는데 필요했던 시간들

나는 가끔씩 아내와 아이들을 바라보며 '엄마'라는 존재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그리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엄마는 한 아이에게 온 우주이며 평생을 살아갈 세계를 만들어주는 엄청난 존재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키우는 이 세상 모든 엄마들이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리고 엄마들이 행복할 수 있게 아빠들이 기꺼이 자기를 내어주면 좋겠다. 아이가 엄마에게서 결핍을 채우듯이, 엄마들도 남편을 통해 결핍이 채워져 모두가 행복하길 바래본다.


"그래, 첫 기억이 뭐야?"

정신분석 첫 회기 때 받은 질문이다. 내 첫 기억에는 어머니가 계신다. 그 기억과 관련된 느낌은 아직도 내 삶을 지배하고 있다. 그만큼 첫 기억이 누구와 관련되어 있고, 그때 느낌은 어떠했는지가 중요하다. 그게 사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누구와의 느낌이 어떠했는지 그게 전부다. 그 느낌을 실마리 삼아 시간을 좇아가면 지난한 내 삶을 이해할 수 있다.


"뿌옇게 실마리가 잡히지 않아요."

뭐든 쉽게 얻어지는 것은 없었다. 질문을 마주한 순간부터 첫 기억에 대한 느낌이 잡히지 않았다.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장면만 기억될 뿐 느낌은 없었다. 그렇게 어머니에 대한 내 느낌은 향이 없는 말라비틀어진 꽃다발이었다. 차라리 엉킨 실타래라면 끄트머리라도 찾아보겠다. 하지만 자욱한 안갯속에 놓여있는 기분이었다. 감정이 있어야 느낌도 기억될 텐데.. 감정조차 없다니 뭔가 이상했다. 그리고 부자연스러웠다.


"쯧쯧, 정서적 교감이 없었구만."

시간이 흘렀다. 엉켜있던 실타래는 엉뚱한 곳에서 풀렸다. 실마리는 할머니였다. 살면서 나는 어머니에게 화를 내본 적이 없다. 어리광을 피워본 기억도 없다. 내가 화를 내고 어리광을 부려본 유일한 대상은 할머니였다. 할머니에 대한 느낌은 따스했고, 어머니에 대한 느낌은 차가웠다. 어머니와 나는 정서적 교감이 없었다. 그런 어머니에게 내가 선택한 저항은 억압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억압된 감정이 자각되자 서글픔이 밀려왔다. 그리고 수많은 감정들을 마주했다. 스스로 감당하기 버거웠다.


"아내의 볼멘소리에 머리가 아파요."

결혼을 하고 아내는 이런저런 불만을 해결해 달라 내게 요구했다. 아내로서 남편에게 요구할 수 있는 당연한 것들을 나는 볼멘소리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머리 아파하면서 회피에 급급했다. 아내의 하소연에 드는 감정은 어머니의 푸념에 대한 나의 억압된 감정이었다. 어리석게도 아내의 하소연을 어머니의 푸념으로 느끼고 있었다. 억압된 감정의 자각은 변화를 불러왔다. 비로소 아내의 하소연이 보였다.


"허허, 불필요하게 죄책감을 심어주었구만."

어머니는 서운한 일들이 생기면 어린 나를 앉혀놓고 넋두리를 하셨다. 내 머리가 제법 굵어지고부터 본인의 감정이 우선인 어머니에게 지쳐갔다. 보통의 부모는 자식에게 불필요한 불안감을 만들어주지 않도록 행동을 삼간다. 그러나 어머니는 본인의 힘듦을 나에게 그대로 보이셨다. 여러 상황을 통해 나는 불필요한 죄책감과 피해의식이 심어졌다. 어머니께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억압과 회피였다. 그 피해를 엉뚱하게 아내가 받았던 것이다. 아내 입장에서 이보다 더 억울할 일이 또 있겠는가?


"투 채널 소통, 너무 힘드네요."

억압된 감정이 자각되면 현실을 바로 볼 수 있게 된다. 어머니의 독특한 패턴이 눈에 밟혔다. '투 채널 소통', 자신의 부담을 상대에게 전가하는 건강하지 못한 자기표현이었다. 말씀으로는 괜찮다 하시지만 비언어적으로 서운함을 표현하셨다. 그리고 형제 중 누군가를 통해 당신의 불만을 내게 전달해 오셨다. 그때마다 나는 죄책감을 느꼈고 어머니는 결국 원하는 것을 받아 내셨다. 그 끝은 분노의 자각이었다.


"어머니를 가르쳐. 그게 효도야."

억압된 감정이 자각되면서 현실의 어머니는 내 기억과 크게 달랐다. 기억은 느낌에 따라 수없이 왜곡된다. 정신치료라는 것이 '느낌 때문에 병들고, 느낌으로 치유된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각된 감정들을 녹여낸다는 것, 결코 쉽지 않았다. 노년의 어머니께 무엇을 하소연하고, 또 탓하겠는가? 어머니께서 남은 여생을 마음 편히 지내실 수 있도록 도와 드려야 했다. 어머니의 넋두리가 들릴 때면 현명한 처신이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지 어머니를 가르쳤다. 어머니의 몸에 밴 서운함도 담담히 견뎌냈다. 그렇게 우리는 어머니가 휘두르시던 감정이 아닌 현실을 살아냈다. 어머니도 힘들고, 그런 어머니를 견뎌내는 나도 힘든 세월이었다.


"어머니, 이제는 마음 편히 지내세요."

긴 세월이 흐른 지금도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깨끗이 정리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와의 사이에 두드러진 변화가 있다. 나는 어머니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어머니도 슬쩍 찔러보실 뿐 현실을 받아들이신다. 최근에도 어머니는 치매를 앓고 계시는 아버지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으셨다. 내 반응은 담담했다. “어머니, 아버지께 뭐 그리 서운하신 게 많으세요? 못 배우시고 어수룩하셨어도 허투루 사시지 않으셨잖아요. 아버지 딴에는 아등바등 사셨잖아요. 그러니 존중은 못하시더라도 무시는 마셔야죠.” 어머니의 반응도 담담했다. “그렇지. 니 아버지가 속은 썩였어도 한눈 한번 안 팔았지. 자기 처갓집에 그렇게 잘한 사람은 니 아버지 밖에 없을 거다. 그 기억으로 여태껏 살지.”



이전 07화 아버지, 지금 뭐 하세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