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에 대한 짧은 생각
도깨비불을 본 적 있으세요?
문득, 오래전 시골에서 아버지 심부름을 다녀오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읍내에서 몇 가지 물건을 사 자전거에 싣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죠. 그 시절엔 가로등이 없어, 해가 지면 금세 칠흑 같은 어둠이 신작로에 내려앉았습니다. 출발이 늦었던 탓에 달빛을 길잡이 삼아 비포장길을 달리게 되었죠.
보슬비까지 내리던 밤이라 혼자 달리는 길이 더없이 스산했습니다. 문제는 마을 입구였죠. 그곳에 이르려면 산모퉁이 무덤가를 지나야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푸르스름한 불빛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순간, 머리가 쭈뼛하고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 무섭게 페달을 밟아도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겁니다.
자전거는 내팽개친 채, 냅다 뛰어 집에 도착했습니다. 아버지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린 뒤에야 길가에 널브러져 있던 자전거를 다시 찾으러 갈 수 있었죠. 어두컴컴한 보슬비를 뚫고 이글거리던 푸르스름한 불빛이 도깨비불이었는지, 자전거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던 게 도깨비들었는지는 끝내 알 길이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뭐였을까 궁금하긴 하네요. 오컬트 영화를 즐기는 것도, 어쩌면 그날의 기억이 마음 어딘가에 눌어붙어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컬트 영화에는 천국과 지옥, 윤회와 무속, 신화와 전설이 뒤엉킨 초자연적인 세계관이 존재합니다. 불교의 윤회사상처럼 삶과 죽음이 순환하고, 그리스·로마 신화처럼 신들은 인간과 닮은 욕망과 약점을 지닌 채 세상을 엿봅니다.
흥미로운 건, 그런 신화와 믿음들이 풍요의 땅이 아니라 척박한 고통의 땅에서 피어났다는 겁니다. 어쩌면 초자연적인 세계관도 그 자체로 신비한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견디기 위해 인간이 빚어낸 상상과 욕망의 그림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후 세계가 정말 있을까요?
다녀와 보니 있더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아직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일상을 살다 보면, 가끔은 못된 사람들을 보며 불지옥에 떨어져 벌 좀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고, 선하게 살아온 사람이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좋은 곳에서 평안하길 마음속으로 기원하게 됩니다.
초자연적인 존재가 있을까요?
이건, 솔직히 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현실이 답답할 때면, 가끔은 DC 코믹스나 마블 영화 속 슈퍼히어로가 진짜로 나타나 복잡한 문제를 시원하게 정리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아무튼, 사후 세계든 슈퍼히어로든 우리 양심이 바라는 한 마음속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베푸는 마음에는 보답이 따르고, 못된 마음에는 합당한 벌을 받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힘든 내 하루를, 내 인생을 구해주길 바라는 거죠.
생각의 각도를 바꿔보겠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 현상과 인간 감정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자, 그것을 신(神)의 이야기로 형상화했을 겁니다. 고대 인도인과 붓다는 우주 만물, 삶과 죽음을 이해하고, 존재의 고통을 끊어내기 위해 윤회사상을 만들어냈을 겁니다.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윤회, 사실일까요? 사후 세계처럼 과학적으로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처럼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한 방편으로 생각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로 생각이 흘러갑니다.
지옥이 별거인가요?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이 괴롭다면 그 자체가 지옥입니다. 반대로 내 마음이 평안하다면, 무인도조차 천국으로 느껴집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매일같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살아갑니다.
“네 덕분에 살았어. 정말 고마워.”
“아, 너무 괴로워. 죽을 것 같아.”
하루에도 몇 번씩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셈이네요. 이렇게 우리는 일상에서 윤회를 겪고 있습니다.
저는 슈퍼히어로도 여럿 만났습니다.
생사의 기로에선 아들을 살려보겠다며, 며칠 밤을 병원에서 눈물로 버티던 어머니. 생활비에 쪼들리던 날, “조카 돌반지도 못해줬는데, 돌반지 값이라 생각해”라며 흰 봉투를 건네던 동생.
내 실수로 문책을 받으면서도 “배웠으니 된 거야”라며 감싸주던 팀장님. 급한 회사일로 가족여행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던 내게 “이건 내가 맡을게, 넌 마음 편히 다녀와”라며 손 내밀던 동기.
그들은 하늘을 날지 못했지만, 자기 삶으로 내 하루를 내 인생을 구해낸 나의 슈퍼히어로들입니다.
도깨비불을 봤던 그날 밤, 아버지는 제 이야기를 나무라지도, 다그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말없이 제 손을 꼭 잡고 길을 나서셨죠. 쓰러진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고, 비에 젖은 안장을 조심스레 닦아주셨습니다. 저는 앞서 자전거를 타고, 아버지는 말없이 뒤를 따라오셨습니다. 그날 밤, 아버지의 든든함이 지금도 제 기억 속에 선명합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나 역시 누군가의 슈퍼히어로가 되어야 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윤회가 별거인가요? 내가 받은 고마움은 다른 누군가에게 건네고, 내가 받은 상처는 조용히 가슴에 묻는 것 아닐까요? 그게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드는 방식이 아닐까 싶네요.
그러니 오늘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었다면, 당신은 이미 누군가의 삶을 구해낸 슈퍼히어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