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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oniist Oct 10. 2021

은행을 처음부터 먹은 건 아니었어

2021. 10. 9. 토.


가을이라 그런지 걷다보면 은행이 많이 밟힌다. 은행은 냄새가 고약하기 때문에 밟으면 좀 찝찝하다. 가을에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워지는 이유다. 집 주변에도 은행나무가 참 많은데 믿기 어렵지만 은행나무는 멸종위기종이라고 한다. 은행은 종자가 커서 동물을 매개로 번식해야 하는데 이 씨앗이 독성과 악취를 갖고 있기에 동물들의 기피대상이 되었고 몇몇 비위 좋은 매개 동물들마저 멸종한 탓이라고 한다. 그런 이유로 현재 은행나무의 유일한 매개 동물은 바로 인간이다. 우리가 보는 은행나무는 야생의 은행나무가 아니라 모두 인간의 손을 거친 은행나무다(인류가 멸망하면 은행나무도 멸망한다.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빌런들에게 꼭 이 말을 전해야 한다. 은행나무는 무슨 죄냐고).


은행나무와 아파트 건물은 묘하게 잘 어울린다

은행나무 이야기를 찾아보기 위해서 나무위키와 (아마도 그 나무위키를 인용하였을)기사 및 포스팅을 읽어보니 은행나무는 생각보다 더 흥미로운 존재였다. '살아 있는 화석'이라 불릴만큼 오래되었다는 것은 학교에서 배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학교에서 배웠던 것 중에는 생물 분류 단계라는 것도 있었는데 생물을 '계-문-강-목-과-속-종'으로 조금씩 범위를 좁히며 분류하는 방법이다(개인적으로 '칼칼나마알아철'처럼 리드미컬하지 않아서 외우기가 쉽지 않았다). 이 분류에 따르면 사람의 경우 동물계-척삭동물문-포유강-영장목-사람과-사람속-사람이다. 다섯 번 정도 분류를 거쳐야 사람이라는 동물이 수면위로 보인다.


반면 은행나무의 경우 식물계-은행나무문-은행나무강-은행나무목-은행나무과-은행나무속-은행나무이다. 위엄이 느껴진다. 그야말로 유일한 존재다. 또 그만큼 외로운 존재이기도 하다. 사람은 척삭동물문에서 멍게, 미더덕과 함께 놀고 있지만 은행나무는 식물계 딱지를 떼는 순간부터 오로지 혼자다(도전 골든벨 출전자들 중 탈락자들을 탈락한 문제별로 같이 묶어 놓는다면 은행나무는 1번 문제에서 혼자 틀려서 혼자 있는 셈이다). 은행나무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앞으로 외로운 은행나무를 쉽게 지나칠 수 없을 것 같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종종 은행을 구워서 주시고는 했다. 그때 어머니는 은행이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는 말과 함께 하루에 다섯 개만 먹어야 한다고 일러주셨다. 나는 둘 다 동의할 수 없었는데 은행은 정말 맛이 이상해서 평생 내 손으로 먹을 일은 없다고 장담했으며 그렇게 맛있는 데 왜 하루에 다섯 개만 먹어야 하는지는 더욱 의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꼬치구이 집에 가면 으레 은행 꼬치를 주문할 정도로 그 맛을 즐기고 있고 은행이 독성을 지니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섯 개 이상은 먹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이런 변화가 종종 있는 편인데 내 취향이 아니라고 확신한 어떤 것을 어느 새 좋아하고 있다거나 반대로 내 취향이라고 확신했지만 지금은 전혀 관심도 두지 않는 경우다(전자는 은행이고 후자는 프로야구다). 어려서부터 확고한 취향이 있는 사람도 많겠지만 나는 내 세계가 넓어지면서 취향이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섣불리 내 취향이 무엇이라고 단언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가끔 내 취향에 맞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고는 한다. 


가장 최근 그런 기쁨을 느끼게 해 준 것은 바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vid Foster Wallace, 이하 DFW)' 라는 작가다. 아쉽게도 DFW를 어떻게 접하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작년에 어떤 책이나 글에서 언급된 것을 보고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에세이를 모은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번 다시 하지 않을 일'(바다출판사)을 샀고 이 책의 표제작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을 읽으며 깨달았다. '아, 이게 내 취향이다'(진짜 그랬다. '아, 이건 내 취향이다'라고 한 게 아니라 '아, 이게 내 취향이다'라고). 


DFW가 청탁을 받아 호화 크루즈 여행을 하며 쓴 관찰기인 이 에세이는 처음 읽었을 때 어마어마한 주석 때문에 난감했었다. 나는 주석을 페이지 아래에 달아 놓는 것보다 책 뒤에 모아 놓는 것을 선호하는데 이유는 대부분의 주석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에세이의 주석은 원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양이 많기 때문에 지나칠 수가 없어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내 책을 덮고 말았다. 너무 설레서. 그의 주석은 원문안에 또 다른 원문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존재감이 있는데 수많은 주석들이 말 그대로 '무한한 재미'를 선사하고 있었다(아, 여기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이 책을 엮고 옮긴 김명남 님의 탁월한 역량이다). 


이후 나는 DFW의 책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의 북투어를 다룬 영화 '디 엔드 오브 더 투어'도 DVD를 구입하여 봤다. 그리고 그의 세계로 입덕하게 되었다(다행히 그 난해함 때문에 그의 소설들은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아직도 덕질할 것이 남아있는 것이다).


DFW콜렉션.

사실 DFW의 글은 내가 나쁜 글의 요소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갖추고 있다. 장황하고, 중언부언하고, 냉소적이고, 어렵고, 철학적이고, 싸구려 유머를 구사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내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글을 썼다. 독자를 스스로 발견하게 하는 글. DFW의 글을 읽고 나는 내 취향을 확인했고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글을 쓸 때는 하루키와 DFW 사이의 어딘가를 생각하며 쓰고 있다.


DFW는 호불호가 나눠지는 작가에 속할 것이다(개인적으로 이것은 찬사라고 생각한다). 아마존에서 그의 책에 대한 독자들의 리뷰를 살펴보니 실제로 그의 글을 싫어하는 사람도 꽤 많았다. 약점 많은 글을 썼지만 그럼에도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삶과 글을 진심으로 대한 그의 모습 때문이다. 그리고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한 그의 삶은 진심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해준다(나는 쉽게 살기 위해 삶의 많은 것들에 눈을 감는다).


이런 마음을 담아 그를 오마주한 캐릭터를 '다다다'에 등장시켰다. '다다다'를 그리기 시작할 때부터 꼭 넣고 싶었던 캐릭터이다. DFW를 대변하기보다는 그의 영향을 받은 나의 생각을 나름대로 표현하는 역할을 맡았다. 삶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고 있으며 다른 친구들의 고민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진지하고 과감하게 들려주는 녀석이다.


그랬으면 해.


이 캐릭터를 마지막으로 현재까지 등장한 캐릭터들의 소개가 끝났다. 아직 에피소드가 많지 않아서 각 캐릭터의 특징이 축적되어 전달되고 있지 못하지만 앞으로 캐릭터성을 더 부각시키는 데 집중할 예정이다. 다른 작품들을 보면서 캐릭터 구축은 어떻게 하는지 공부가 더 필요하다. 


(아직도) 고교생인 마이클 조던은  농구캠프에 참가하여 자신의 실력을 미국 전역에 알렸다. 캠프에 참가할 당시만해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고등학생이 캠프가 끝난 뒤 수많은 대학들의 관심을 받는 스타가 되었다. 그렇게 조던 신화의 장이 열렸고 조던 역시 이 캠프를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런 '전환점'의 시기가 있다. 삶이 이쪽과 저쪽으로 나누어지는 순간.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나 자문해보면 그렇게 드라마틱한 전환점은 역시 없었다고 해야겠지. 하지만 소소한 전환점들은 다른 사람들만큼 있는 편인 것 같다. 이제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겠구나 하는 순간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를 만난 것도 그중 하나일테고. 

그나저나 예전부터 '소년등과'는 인생의 악재라고 하였는데. 조던은 이 악재마저 이겨냈나보다.


- 요즘 듣는 노래 : 진심으로 너를 위해 부르는 노래 (자우림, 원슈타인)

- 요즘 마시는 것 : 조지아 고티카 빈티지 블랙

- 요즘 읽는 책 : 빅슬립(레이먼드 챈들러), 미기후(이민하), 호시절(김현), 마이클 조던(롤랜드 레이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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