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 <명탐정 코난 :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름은 늘 새롭게 덥다. 그동안 여름을 겪으면서 쌓아온 내 나름의 경험, 노하우, 대응 능력들이 있을 텐데 무더위 앞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스무디는 조금 도움이 되긴 하지만). 그래서 여름은 매년 유난히 덥다. 실제로 해마다 여름이 더워지고 길어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 영욕의 여름 경험치가 스탯에 반영되지 않는 건 역시 억울하다. 여름 40년 차나 여름 10년 차나 더위 앞에서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분수대에서 물을 맞으며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을 보면 그들이 나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해서 이 막강한 무더위 앞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어른들은 늘 가만히 있으면 안 덥다고 하지만). <2024 무더위 피하기 대작전>으로 '밤극장 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야심한 시각, 홀로 들어선 극장에는 아무도 없다. 매점을 지키는 직원도 음료 디스펜서를 닦으며 마감을 하고 있는 중이다. 텅 빈 로비에는 나처럼 혼자 온 듯한 남자가 슬리퍼를 끌며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어디에선가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이 서늘함을 넘어 차갑게 느껴진다. 팔뚝에서 스르르 털이 일어선다.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보니 영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 키오스크로 가서 예매한 티켓을 찾는다. 눌러야 하는 예매번호는 열다섯 자리. 너무 많은 번호에 조금 짜증이 난다. 2, 0, 2, 4... 문득,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누가 내 뒤에 줄을 선 것일까. 비어있는 키오스크가 많아 굳이 내 뒤에 서 있을 필요가 없을 텐데?! 슬쩍 뒤를 돌아보지만, 아무도 없다. 다시 키오스크 화면을 바라보고 서둘러 나머지 숫자를 찍는다. 2, 0, 2, 444... 손가락이 떨려서인지 엉뚱한 번호가 눌린다. 두려움 섞인 짜증이 밀려오는 그때, 화면에 비친 내 등 뒤로 검은 그림자가 불쑥 나타난다.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괴한에 의해 키오스크에 머리를 한차례 처박힌 나는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는 중이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 때문에 도저히 눈을 뜰 수 없다. 소리를 질러보지만 충격 때문인지 소리가 목에 걸려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이 사람은 누구지? 매점 직원? 아니면 슬리퍼 남자? 도대체 지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됐다. 쓸데없이 궁금해하며 힘 빼지 말자. 차분히 다음 단계를 기다리자. 그 꼬마의 말처럼 진실은 언제나 하나니까.
그렇습니다. 이번에 본 영화는 <명탐정 코난 :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입니다. 영화 리뷰답지 않게 이번 영화는 대략적인 줄거리를 소개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지어낸 이야기로 서두를 채워봤습니다(그래도 키오스크에서는 언제나 등 뒤를 조심하시길).
명탐정 코난 :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
내가 이 영화의 줄거리를 적지 못하는 건, 영화를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설의 검 '성릉도'를 둘러싼 살인 사건과 추리라는 메인 테마가 존재하지만, 사실 이 영화의 진짜 재미는 30년 동안 쌓아 올린 캐릭터들의 서사와 그들 관계의 발전, 답보, 후퇴에 있다. 때문에 관객이 영화를 만끽하려면 모든 캐릭터들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명탐정 코난> 단행본 1권 이후, 단 한 권도 보지 않은 나에게는 당연히 그 재미를 느끼는 것도, 이야기를 따라잡는 것도 무리였다(실제로 코난, 란, 모리 탐정 외 다른 캐릭터들은 거의 초면이었으며 심지어 '괴도 키드'라는 녀석은 변신의 귀재라는 설정이어서 종종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런 '코난 무지렁이' 임에도 이 영화를 보러 밤극장을 찾을 이유가 있었다. 최근 영화를 꾸준히 보고 글을 쓰다 보니 관련 뉴스들을 살피게 되는데 <명탐정 코난 :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이 개봉 첫날 11만 명을 모으며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는 기사를 봤다. 디즈니나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아님에도 이런 호응을 얻었다는 게 놀라웠는데 이어서 발견한 <씨네 21>의 '명탐정 코난 에디션'은 충격적이었다. 아무리 연재 30주년 기념이라고 하지만 한 권을 통틀어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다루는 것은 이례적인 일 아닐까. 코난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단 말인가? 도대체 코난이 뭐길래.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이 영화를 봐야 했다. 관람 끝에 얻은 것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감동이었지만.
영화를 본 건 7월 30일 밤.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자 나는 이 사람들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동안 <명탐정 코난>과 함께 해 온 이들은 내가 느끼지 못하는 감동과 재미를 즐기고 있었다. 마치 만기가 도래한 적금을 타듯. 그렇게 영화가 진행되는 두 시간 동안 나는 긴 생명력을 지닌 콘텐츠가 갖는 힘을 절감했다. 그리고 내가 만들고 있는 콘텐츠의 목적지를 또 하나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이미 목적지가 여러 군데 있습니다만).
창작자는 잘 만든 스토리, 짜임새 있는 연출, 아름다운 음악 등으로 감동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수용자는 작품을 감상하는 내내 이것들로 인한 감동을 느낀다. 그것만으로도 성공이지만 만듦새에 따라서는 작품이 끝난 뒤, 마음에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작품은 대성공일 것이다. <명탐정 코난>과 같은 프랜차이즈 애니메이션은 여기에 또 하나의 감동을 더한다. 그것은 시간의 질감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시간을 '빠르다', 혹은 '느리다'라는 식으로 말하고 이해한다. 하지만 시간의 본질은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시간을 측정하는 올바른 방법은 속도보다는 용량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늘 그렇진 않고 양치하거나 샤워할 때 문득문득). 시간이라는 커다란 공간이 있고 거기에 무언가가 차곡차곡 채워지거나 휑하니 비워지는 것. 그렇게 시간을 종종 떠올리곤 한다. 그러면 시간에 물성이 생겨 그 살갗이 만져지는 것 같기도 하다.
<명탐정 코난 :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의 재미는 앞에서 말했듯 캐릭터의 서사에 달려있다. 그리고 감동은 30년이라는 '코난의 시간'이 온전히 담당하고 있다. 1년 만에 돌아온 코난의 추리극을 보며 관객들은 1년 혹은 그보다 더 긴 시간을 자신의 무릎 위에서 쓰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코난의 시간'에 '자신의 시간'을 겹치면서. 내가 지나온 시간이 어디론가 증발하지 않고 현재로 소환되어 이렇게 만질 수 있다는 것은 꽤나 감동적이다. 그리고 시간이 그저 지나가지 않고 어딘가에 잘 쌓여있다는 것을 실감할 때 우리에겐 살아갈 힘이 생긴다.
그 자리에 있는 많은 관객들 중에 나만 그러지 못했다(일례로 쿠키영상에서 코난과 괴도 키드가 '사실은 사촌이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건 꽤 놀라운 일이었는지 함께 있던 코난 팬들은 모두 탄식하였지만, 괴도 키드를 처음 볼 때부터 '코난이랑 사촌인가? 엄청 닮았네.'라는 생각을 하던 나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부러웠다. 시간 속에 자기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살뜰하게 쌓아둔 사람들을 보면 늘 부럽다(다행히도 이 부러움은 며칠 뒤 극장에서 <사랑의 하츄핑>을 보며 얼마간 해소할 수 있었다. 나의 시간에 티니핑들을 잔뜩 쌓아 놓은 딸에게 감사를...).
영화가 끝난 뒤, 출구로 향하는 관객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약간의 흥분을 지니고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은 내가 모르는 사이 아마 매년 같은 모습으로 반복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년에도 반복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그 '코난의 시간'에 동참해 볼까 잠깐 고민했지만, 역시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감동을 느끼는 쪽보다는 감동을 주는 쪽에 더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인가. 매점을 정리하는 직원도, 슬리퍼를 끄는 남자도 없는 밤극장을 나서며 나는 내내 그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