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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oniist Sep 04. 2024

출구와 입구_<이오 카피타노>

* 이 글에는 영화 <이오 카피타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년 이맘때쯤, 퇴사를 했다. 막 퇴사를 한 시점에는 퇴사 이유를 수십 가지 꼽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누가 물어보면 머릿속에 회색 구름들이 두둥실 떠다니기 시작하는데 그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이제는 그냥 무라카미 하루키식으로 대답하면 편할 것 같다.


'파티션 색깔이 맘에 들지 않았어.'(실제로 그랬다는 건 아니고.)


회사에 다니는 시간이 늘 좋았던 건 아니지만, 나에겐 소중한 시간이었다. 개인적인 일로 이리저리 흔들리던 30대에 회사가 안정적으로 있어주었기에 어쨌든 그 시절을 넘길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회사를 떠난 뒤에도 매일 회사 소식을 찾아보고, 홈페이지에도 들어갔다. 퇴사하던 날, 연인과 이별하는 것 같은 감정을 느꼈는데, 퇴사 후의 후유증도 그것과 닮아 있었다(모양이 많이 빠지는 것도). 이런 퇴사자는 좀 이상한가? 제 솔직한 감정이 그랬습니다.


  1년이 지난 지금, 전 회사를 생각하는 일은 부쩍 줄었다. 몸은 결국 오래된 습관을 지우고 새로운 습관을 저장한다. 이젠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 사이에 집에 있는 것이, 혹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그 시간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법 알게 되었다. 손님이 뜸해서 매출이 걱정되던 집 앞 편의점이 낮에는 그 옆에 있는 중학교 학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는 것도, 젊은 사람들이 일터로 사라진 그 시간대의 거리는 어르신들의 차지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그렇게 사무실 밖의 세상에서 살아간 탓에 나는 이번 여름 정말 많이 탔다. 안 타려고 밤극장까지 갔는데 말이다.

출처 : 네이버

  이번에 본 밤극장 영화는 <이오 카피타노>. 날짜는 8월 8일. 극장은 다시 박찬욱관이었다. 몇 번 관람을 해보니 박찬욱관은 매우 좋은 컨디션으로 독립·예술 영화(이런 구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를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작은 상영관도 그만의 매력이 있지만 대형 스크린과 뛰어난 음향 시설이 겸비된 상영관의 몰입감은 확실히 다른 세상에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 면이 박찬욱 감독의 영화와 일면 닮아있다. 와 같은 생각을 하다 보니 또 영화가 시작되었다.



이오 카피타노


  열여섯 살 세네갈 소년 세이두는 음악으로 성공하겠다는 자신의 꿈을 위해 가난한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사촌 무사와 함께 일용직 근로를 하며 6개월간 유럽행을 준비한 그는 가족들 몰래 국경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탈출에 성공한 세이두와 무사는 부푼 기대감을 안고 버스 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만든다. 하지만 현실이 상상과 다르게 전개되자 세이두의 얼굴에 천천히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마을을 떠나겠다는 자신에게 엄마가 한 말이 그제야 떠올랐을 것이다.


"여길 떠난 사람들은 사막에서 말라죽고 바다 한가운데 빠져 죽었어. 곳곳에 시체 천지라고!"


  세네갈-말리-니제르-리비아-이탈리아에 이르는 한 소년의 여정을 담은 <이오 카피타노>는 유럽으로 밀입국하는 아프리카 이주민들의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보여준다(실제로는 더 험난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미덕은 그 처참함과 고통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데 있지 않다. 외려 온 힘을 다해 출구를 빠져나와 결국 입구에 다다른 소년이 내뿜는 빛을 증폭시키는 데 있다.

출처 : 네이버

  다리에 부상을 입은 사촌 무사의 병원 치료가 시급하게 되자 세이두는 리비아에서 이탈리아로 보내줄 브로커를 찾는다. 터무니없는 돈을 들고 온 세이두에게 브로커는 배를 직접 운전하면 세이두와 무사를 태워주겠다고 한다. 배에 오를 수 있다는 기쁨에 제안을 승낙하지만 이후 세이두는 그 배에 수많은 아프리카 이주민이 함께 탈 것임을 알게 된다. 배를 몰아본 경험이 없는 세이두는 브로커를 찾아가 이 많은 생명을 책임질 수 없다며 자신에게 키를 맡기지 말아 달라고 읍소하지만 거절당한다. 결국 언제 지옥이 될지 모를 바다로 세이두의 배가 위태롭게 나아간다. 


지중해를 떠다니길 며칠째, 임산부 탑승자에게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자 세이두는 그녀가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배를 멈춘다. 그리고 브로커가 알려준 대로 무전기를 통해 지원을 요청하지만 '시간이 좀 걸린다'라는 말을 들을 뿐이다. 긴 기다림의 끝에 세이두가 무전기에 대고 말한다.

"그냥 우리가 이 바다 한가운데서 죽길 바라는 거죠? 이제 내가 책임지고 모두 이탈리아로 데려갈게요. 모두 무사히 도착할 거예요." 

세이두는 그렇게 출구를 완전히 벗어난다.

출처 : 네이버

  삶의 한 과정에서 다른 과정으로 넘어갈 때, 어디쯤에 출구가 있고 입구가 있을까. 전에는 이런 것을 의식해 본 적 없지만 퇴사 후 다른 삶을 그리면서 이런 생각들을 종종 하고는 했다.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본격 출구 찾기 소설' <1973년의 핀볼>을 읽은 뒤에는 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출구와 입구 중 난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니, 나는 출구에서 완전히 나오거나 입구로 완전히 들어간 것일까?


퇴사 후 지난 1년간, 새로운 입구를 찾아보았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 이유를 이제는 짐작할 수 있다. 내가 끌어안고 있던 알량한 과거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낼 때쯤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난 아직 출구에 걸쳐있다. 너무 자주 뒤를 돌아보았고 쓸데없는 미련을 남겨두었다. 출구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나에게 입구의 빛은 보이지 않는다. 입구를 찾으려면 먼저 출구를 벗어나야 했다. 막다른 길에 이르러서야 진짜 항해를 시작하는 세이두처럼.


  다시 긴 시간의 항해 후, 세이두의 시선 끝에 육지가 보인다. 환호하는 사람들 속에서 배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른 세이두는 자신들을 정찰하러 온 이탈리아의 헬리콥터에 소리친다. 

"내가 선장입니다, 내가 해냈어요, 모두를 구했어요, 아무도 죽지 않았어요!"

출처 : 네이버

하지만 세이두의 외침은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하나의 출구를 벗어나 새로운 입구의 문턱에 들어섰지만 그 안은 다시 깜깜할 뿐이다. 입구는 밝은 미래를 약속한 적이 없다. 그렇지만 좌절할 일은 아니다. 삶이 그런 모양이라는 건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지금 봐야 하는 것은 세이두 앞에 놓인 입구의 어둠이 아니라 출구를 벗어난 그가 발휘하는 빛이다. 곧 사라질 그 빛을 기억 속에 잡아두어야 한다. 그렇게 모아둔 빛이 결국 입구 속 어둠을 밝혀줄 것이기 때문이다.


  출구를 완전히 벗어난 나는, 어둠 속을 더듬으며 한발 한발 내디뎌야 한다. 그 어둠을 미약하게나마 밝혀줄 작은 빛이 나에게도 있다고 믿는다. 그 빛에 의지하며 어둠 속을 꾸준히 응시하는 일. 그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길 기다리며.


  영화가 끝나고 찾아보니 <이오 카피타노>는 'I'm the captain.'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라고 한다. 헬리콥터의 소음 속에서 세이두는 "이오 카피타노!"라고 외쳤던 것이다. 거대한 소음 속에 던지는 작은 외침은 바위에 던져지는 계란 같은 것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한 울림이 있다. 가만, 이런 비슷한 말을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 것 같은데? 역시 요즘 무라카미 하루키를 너무 많이 읽었다. 당분간 좀 멀리해야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얼른 집에 가서 그의 에세이집을 들춰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때문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자마자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들려오는 노래 때문에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아마도 세이두와 무사가 불렀을 그 노래를 듣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파바로티의 나라에서 이런 음악성을 못 알아볼리가 없다. 역시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일 것이다.

(집에 돌아와 찾아보니, 무라카미 하루키는 '장벽에 부딪혀 깨진 계란이 있다면, 자신은 언제나 그 계란 편에 설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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