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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oniist Sep 18. 2024

혼자 아이스크림 먹기_<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

* 이 글에는 영화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긴 카페가 아니라 아이스크림 가게였다. 그날따라 들어가려는 카페 대부분에 자리가 없어 보였다. 몇 개의 카페를 지나친 뒤, 길 건너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눈에 띄었다. 거기에서라도 커피를 마실까 하고 매장 안을 흘깃 쳐다보았다. 하지만 커피향이 나지 않는 곳에서 커피를 마시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방금 무언가 중요한 걸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시 멈춰 서서 다시 매장을 살펴봤다. 거기에는 한 사람이 혼자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나는 진짜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혼자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람에게는 특별한 면이 있다. 혼자 밥 또는 술을 먹는 사람들이 갖추고 있거나 그들을 보는 사람들이 지레 느끼는 모종의 의연함이 혼자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람들에게는 없다. 대신 그들에게는 진짜 좋아하는 것을 즐기고 있다는 진지함과 발랄함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모습은 이상하게 위안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선뜻 혼자 매장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먹을 용기는 없지만.


 아닌 게 아니라 위안이 필요한 시기다. 날은 덥고 일은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는다. 갖고 있는 에너지가 작업에 집중되지 않고 불안함, 허무함을 위해 소모된다. 부정적인 마음을 없애기 위해 '반드시 이루어진다'라고 되뇌어보기도 하지만 마음속에 잠깐 불꽃이 일뿐, 금방 꺼지고 만다. 

자기 계발서나 동기부여 영상 같은 것을 보면 '믿는 것만으로도 이루어진다'라고 하는데 아쉽게도 나는 더 이상 그런 말을 믿지 못하는 류의 사람이다. 그냥 믿어버리면 원동력도 생기고 걱정도 덜고 마음도 편할 텐데, 미래의 일은 내 소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무엇보다 온 우주가 나를 위해 반드시 이뤄야 하는 게 있을 수 있나? 그건 왠지 계면쩍은걸.

그러니 그저 하던 걸 계속하는 수밖에. 8월의 마지막 밤극장으로 향했다. 8월 25일.

출처 : 네이버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


  1939년 9월 3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 세계대전의 그림자가 유럽에 드리워진 그때, 옥스퍼드 대학교수 C.S. 루이스는 오스트리아에서 영국으로 망명한 프로이트의 초청을 받는다. 최근 자신이 쓴 책 <순례자의 귀향>에서 프로이트를 패러디한 인물을 등장시킨 것이 화근이었을 것이라 짐작하며 루이스는 폭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기차역으로 향한다. 마침 기차역에는 나치의 공습을 피해 시골로 향하는 아이들이 가족과 이별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이었던 그에게 다시 죽음의 공포가 엄습한다.


입천장암으로 인해 생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있는 프로이트는 런던 자택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전쟁 발발 여부에 대해 촉각을 세우고 있다. 전시 상황에 대비해 곁에 있겠다는 딸 안나에게 평상시처럼 학교로 돌아가 학생들을 지도하라 말하는 프로이트. 온갖 신들의 조각상이 가득한 서재에서 홀로 루이스 교수를 기다린다. 지독한 통증을 잠시나마 잠재워 줄 모르핀과 위스키를 들이키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자 루이스가 서 있고 악수조차 나누지 않은 둘은 긴 대화를 시작한다.

출처 : 네이버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939년에 프로이트는 80대 초반, 루이스는 40대 초반으로 두 사람이 실제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이 영화의 원전 격인 책 <루이스 VS 프로이트>(아맨드 M. 니콜라이 지음)의 에필로그에 '한 젊은 옥스퍼드 교수가 이 시기에 프로이트를 방문했지만 그가 루이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과연 그가 루이스였을까?'라고 적혀있을 뿐이다). 오직 과학적 사고만을 믿는 프로이트와 유물론자에서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회심한 루이스가 같은 시대에 영국 내 근거리에 살았다는 사실이 두 지식인의 대담이라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거기에다 주제는 인류의 최대 관심사 '신'과 '죽음'이다. 그래서 정말 대단한, 끝내주는 토론이 있을 거라고 기대되지만! 세상에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아마도). 

다만 당연한 걸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두 사람이 있을 뿐이다.

출처 : 네이버

 유대인으로서 겪은 핍박과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고통 때문에 프로이트는 '만약 환각으로 인해 신이 보인다면 피의 복수를 했을 것'이라고 루이스에게 일갈한다. 하지만 신을 줄곧 부정하는 프로이트의 책상에는 신의 모형들이 가득하고 그 역시 'Thank, God!'을 중얼거리기도 한다. <루이스 VS 프로이트>에 따르면 프로이트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다른 어떤 작품보다 많이 인용했다고 한다. 악마를 신과 떼어놓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한편, 회심한 기독교인 루이스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에서 프로이트는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 경보 소리에 공황에 빠진 루이스를 지적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 끔찍한 세상에서 최후의 날을 자신 있게 맞이하는 사람처럼 행동하진 않더군요. 그 잘난 믿음은 어디 있었습니까? 사랑하는 창조주를 맞이할 기쁨은 어디 가고?"

그리고 이 둘은 스스로의 모순을 부정하지 않는다(적어도 영화에서는).

출처 : 네이버

 생각해 보면 내가 무언가를 믿는 것은 그것이 당연해서이지만, 그 당연한 걸 믿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들을 하나하나 해부한 뒤에도 난 여전히 그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내 코앞까지 당도한 죽음 앞에서 신이 없다고 믿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무차별로 난사되는(그래서 납득할 수 없는) 죽음들을 목격하며 신이 있다고 믿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진짜로 경계해야 하는 것은 무언가를 믿고, 안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쉽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것도 내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지만 필요할 때 몇 번 반복해서 중얼거리는 것이 믿음은 아닐 것이다. 설사 그 행동이 무한한 영광과 번영을 가져올지라도. 그건 자기 기만이 빚어낸 결과다. 뭐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나는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믿음은 오히려 영광과 번영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것 아닐까.


 첫 만남에 악수조차 하지 않던 두 사람이었지만 밤이 깊어지고 고통이 극에 달하자 프로이트는 입속의 보철물을 제거하는 데 루이스의 손을 빌린다(이 작업은 오직 안나에게만 허용된 일이었다). 루이스는 진심으로 프로이트를 걱정하며 좀처럼 곁을 떠나지 못한다. 영화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장면이다. 하지만 다른 믿음을 가졌으면서도 결국 같은 노력을 하고 있음을 발견한 그들이 빚어낼 수 있는 모습이며 우리가 신뢰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둘의 대화가 끝났다. 그렇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루이스는 옥스퍼드로 향하는 밤기차에서 다시 한번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프로이트는 자신의 최대 모순과 다름없는 딸 안나를 마주한다. 믿음은 결코 쉬워지지 않는다.


 영화가 끝나고 핸드폰을 켰다. 늘 그렇듯이 인스타그램을 먼저 열었는데 계정에 새로운 피드백은 없었다. 약간의 낙심이 따라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낙심을 이겨내기 위해 반사적으로 '나는 된다, 반드시 될 것이다'라며 희망 회로를 돌려보다가 멈추었다. 역시 이건 너무 쉽다. 대신 앞으로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혼자 아이스크림 먹는 사람을 떠올리기로 했다. 그 사람의 기분이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 때의 내 기분과 아주 비슷할 것이기 때문에(꼭 그 이유만은 아니더라도 왠지 기분 좋아지지 않나요? 혼자 아이스크림 먹는 사람을 상상하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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