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룩백>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영화다. '밤극장'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딱히 마지막을 정해두고 쓴 건 아니었다. '낮극장'에 갈 수 있을 만큼 선선한 날씨가 되면 그만 써야지라고만 막연히 생각했었다. 하지만 줄곧 기다려온 이 영화의 프리미어 상영회가 9월 1일로 정해지면서 딱 여기까지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은퇴 시기를 고민하던 타자가 어느 날 타석에서 배트를 쥐자마자 이것이 마지막 타석임을 예감하는 것처럼. 그래서 마지막 영화는 <룩백>. 먼저 수입과 배급을 결정한 메가박스중앙에 감사를 드린다(그러고 보니 앞에 쓴 다른 영화의 수입, 배급사들에게도 꾸벅).
굳이 프리미어 상영회를 본 건 진지한 취미가 생겼기 때문이다. 시작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였다. 상영관에 입장하려는데 직원이 말을 걸었다.
"포스터 필요하신가요?"
"아, 예, 예, 예."(이날 이때까지 내 고민은, 무방비 상태에서 늘 세련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얼떨결에 나는 투명한 비닐 포장에 들어있는 A3 사이즈의 포스터를 받아들었고 세상에는 아무리 얇아도 결코 접을 수 없는 종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고무줄이 없어 포스터를 돌돌 마는 것도 마땅치 않았기에 두 손으로 정중하게 포스터를 들고 좌석을 찾아갔다. 그리고 좌석 아래의 바닥이 깨끗한지 확인 후 포스터를 그곳에 보관해두었다. 영화가 끝난 뒤, 포스터를 아주 소중하게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혹시나 구겨지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그 이후로 가능하면 밤극장 영화들의 포스터를 모았는데, <룩백> 프리미어 상영회의 특전이 바로 포스터 증정이었다. 영화를 가장 빨리 볼 수 있고 포스터도 받을 수 있으니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일찌감치 표를 예매해두고 9월 1일을 기다렸다. 극장은 목동 메가박스. 8월 말은 정말 지독한 여름이었지만 이 기다림 덕분에 나쁘지만은 않았다.
룩백
나는 <룩백>을 이렇게 요약한다.
'초등학생 후지노와 쿄모토가 만났다. 함께 만화를 그렸고 헤어졌다. 대학생 쿄모토는 죽었고 후지노는 다시 만화를 그렸다.'
형편없는 요약입니다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영화를 종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어째서인지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종합적으로 조망하려 하면 할수록 생략되고 누락되는 것들의 빈자리가 크게 다가온다. 후지노가 처음 쿄모토의 그림과 연습량을 봤을 때 받은 충격, 분발하기 위해 묵묵히 책상에서 드로잉 연습을 하는 후지노의 뒷모습, 쿄모토에게 격찬을 들은 뒤 비를 맞으며 펼쳐지는 후지노의 스키핑, 후지노의 손에 이끌려 세상 밖으로 나온 쿄모토,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배경 작화 등등 이중 어느 하나를 빼놓고 이 영화를 총체적으로 조명할 수 있을까(성인이 된 이후의 장면은 꼽지도 않았다). 만일 하나도 빼놓지 않겠다고 작심하고 글을 쓴다면 이 글의 러닝타임이 <룩백>의 러닝타임보다 길어질지도 모른다.
결국 이 영화를 사랑하게 만드는 개별 요소들의 존재감과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가 너무 커서 그중 하나만 제대로 말하는 것이 낫겠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그래서 (다음이 있다면) 이번에는 위의 요약문처럼 후지노가 다시 만화를 그린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미대에 진학한 쿄모토가 묻지마 살인으로 인해 희생되자 그 충격으로 후지노는 <샤크 킥> 연재를 중단한다. 쿄모토의 죽음이 자신이 그녀를 세상 밖으로 이끌어냈기 때문이라며 자책하는 후지노. 이어 쿄모토의 남겨진 흔적들을 통해 헤어져 있던 시간에도 쿄모토는 늘 후지노를 보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빈 방을 나서며 후지노는 얕은 한숨을 내뱉고는 자신이 가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후지노는 다시 만화를 그린다.
후지노가 <샤크 킥>을 다시 그리기 시작한 것은 쿄모토와의 추억 소환을 통해 상실감과 자책감을 덜어냈기 때문일까. 그렇게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없겠지만 나는 빗나간 자책에 이어진 정확한 자책이 그녀를 다시 책상 앞에 앉게 했다고 생각한다. 쿄모토의 방에는 <샤크 킥> 단행본이 가득하고 책상에는 독자엽서가 놓여 있다(새 단행본이 발간될 때마다 쿄모토는 후지노를 위해 매번 그 독자엽서를 출판사에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쿄모토의 방 문에는 후지노의 생애 첫 사인이 담긴 한텐이 걸려있다(같은 반 친구들은 후지노에게 나중에 성공하면 사인을 해달라고 하지만, 후지노의 첫 사인을 받는 것은 지금 그녀의 성공을 알아본 쿄모토다). 쿄모토가 늘 후지노를 보는 동안, 후지노는 (적어도 쿄모토만큼은) 쿄모토를 보지 않았다. 때문에 이어지는 쿄모토와의 추억 회상은 아름다운 장면이 아니다. 후지노가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깨닫는 아픈 장면이다.
이에 비하면 자신 때문에 쿄모토가 세상 밖으로 나와 이런 참극을 당한 것이라는 애초의 후지노의 자책은 지나치게 감상적이다. 여전히 쿄모토를 뒤세우는 무례한 자책이기도 하다. 다행스럽게도 그리고 신비롭게도 쿄모토가 그린 네 컷 만화가 후지노의 빗나간 자책의 제자리를 찾아준다.
후지노는 쿄모토의 방안을 나가며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는다.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영화들이 담은 수많은 한숨들과 후지노의 한숨은 다르게 느껴진다. 그녀의 한숨에는 다짐 혹은 결의 같은 것이 없다. 대신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것을 인정한다는 정확한 자책이 담겨져 있다. 빗나간 자책은 인력이 세다. 이런저런 무용한 감정, 변명들을 끌어당겨 외피처럼 두르고 사람을 무너뜨린다. 이런 것들이 오히려 잘못을 인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자책의 끝에서 화살을 사회와 타인에게로 돌리는 일은 빈번하고 요즘은 그럴 것을 권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벗겨낸 자책은 명백하고 정확하다. 잘못을 빠르게 시인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행동하게 만든다(방구석에서 홀로 창작하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덕목 중에 하나 아닐까). 후지노의 잘못은 그녀가 쿄모토와 함께 있지 않았던 것이다(혹자는 이것마저도 후지노의 잘못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다시 자책의 영점이 흐트러지게 된다고 말하고 싶다). 후지노는 이제라도 다시 쿄모토와 함께해야 한다.
돌아온 작업실에서 그녀는 전과 같은 자세로 만화를 그린다.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다만 커다란 작업실 창문에 쿄모토가 그린 네 컷 만화가 붙어 있다(사실은 그저 비어있는 네 컷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쿄모토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믿는 쪽이다). 쿄모토의 만화가 후지노와 마주 보고 있다. 이제야 진짜 '후지노 쿄'의 <샤크 킥>이 그려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가 끝난 후 둘러보니, 객석이 가득 차 있었다. 짧은 러닝타임과 원작의 낮은 인지도(<체인소 맨>만큼은 아니니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기다렸다는 게 놀라웠다. 좋은 작품이 갖고 있는 저력 같은 것을 체감했다고 할까. 지금까지 쓴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은 주관적이고 또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이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그날의 관객들은 모두 각자의 <룩백>을 가지고 일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았을 때 아주 잠깐 자신의 뒷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상이 '조금 더 해보자'는 묵직하고 단단한 마음을 각자의 내면에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 마음, 아직 간직하고 계시는지요. 저도 노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