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벌써 10월이라는 아쉬움이 들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험난한 여름을 버텨냈다는 안도감이 더 크다. 이번 여름을 겪으며 확실히 알았다. 진짜 날씨를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고해서 무더위만 상대하면 되는 게 아니다. 다들 무더위 '그리고' 다른 무엇들 때문에 더 힘든 여름을 보냈을 것이다(정말 수고 많이하셨습니다). 나의 경우에는 '다다다'가 오랜 시간 정체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랬다(해킹을 당할 때는 의외로 덤덤했는데 그렇게 덤덤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명의 만화가는 달의 뒷면에 사는 사람이다. 그는 웬만해선 지구인의 눈에 보이지 않고 그가 그린 만화는 웬만해선 지구인에게 닿지 않는다. 그 외롭고 척박한 공간에서 한여름을 지내려면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아마 그런 것을 예감하고 밤극장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보면, 이 여름 동안 한국 영화를 한편도 보지 않았다는 것이 내가 꽤 힘든 상황이었음을 말해준다. '외국'이라는 거리감 없이 한국 영화를 보기가 왠지 두려웠다. 이런 이유로 한국 영화를 보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나 싶지만, 감정을 너무 많이 소진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결국 나는 이 여름 동안 다치지 않으려고 꽤나 노력한 것이다.
그렇게 이 밤극장에서 저 밤극장으로 옮겨 다니며 영화를 봤고 그 영화들에 대한 글을 썼다. 이런 개인 프로젝트를 해본 것은 처음이고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무사히 여름을 보냈다. 그리고 글을 쓰고 만화를 그리는 것을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시 알게 되었다. 힘들었지만,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의 여름만큼 괜찮은 여름이었다.
그리고 이 여름을 통해 하나를 배웠다. 이제 나는 힘든 날들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누군가의 웃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 더 이상 들춰보지 않고 그 웃음 자체를 믿기로 했다. 그리고 그 웃음을 나누기로 했다. 이런 소회를 쓸 수 있는 것은 밤극장과 그곳의 영화들 덕분이다. 그리고 우주까지 날아올라 달의 뒷면을 살펴보는, 그래서 나를 발견해버린 신기하고 고마운 사람들 덕분이다.
지난여름 동안 내가 쓴 글은 영화 리뷰이지만, 사실 나는 영화를 보기 위해서 극장을 갔다기보다는 극장을 가기 위해서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본 기억은 이렇게 글로 남았지만 극장을 갔던 기억은 금세 사라질 것 같아 좀 아쉽다. 극장을 갈 때마다 뭔가를 하나씩 잃어버리고 왔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랬다면 '이 극장에서는 눈이 큰 올빼미 열쇠고리를 잃어버렸었지', '여기에서는 노란 커피잔이 그려진 엽서를 두고 왔었지', '향유고래가 각인된 커다란 텀블러를 놓고 온 극장이 여기였는데' 하며 밤극장을 좀 더 각별하게 기억할 수 있을 텐데. 무엇 하나 잃어버리지 못한 것이 아쉽다(뭐, 그런 것을 실제로 갖고 있지도 않지만). 그래서 달의 뒷면 같은 방에서 잃어버리지 못한 것들을 잔뜩 그러모은 채, 나는 오늘도 책상에 앉아 만화를 그리고 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하나도 잃어버리지 말자는 심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