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roniist Jul 29. 2024

거인의 기사_<러브 라이즈 블리딩>

거인의 기사

* 이 글에는 영화 <러브 라이즈 블리딩>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즘 날씨는 믿을 게 못된다. 창밖으로 보이는 쨍한 날씨를 믿고 나갔다간 거리에서 무방비 상태로 비를 만나기 쉽다. 반대로 비가 오고 있어서 우산을 들고 나갔지만 날씨가 금세 갤 때도 있다. 우산의 존재감은 비 오는 날보다 맑은 날 더 크게 느껴진다. 어쩜 그리 걸리적거리는지. 

더 커다란 문제는 지금의 비와 무더위가 폭우, 폭염이라는 것이다. 폭우와 폭염 속에 단 10초만 방치되어 있어도 세상에 나를 지켜주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지금까지 나를 지켜준다고 믿었던 무언가가 오히려 나를 단죄하는 느낌마저 든다(왜!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나는 나를 지키지 못하고 나의 보호자는 어디에도 없다. 언제부턴가 여름이면 이렇게 나약함을 실감한다. 

이래놓고 비온다

  7월 17일 밤. 밤극장으로 가기 전 날씨를 확인해 보니 비는 오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조심하는 마음에 차를 가지고 나갔다. 광화문 씨네큐브에 갈 때는 대부분 걸어서 가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과 걸리는 시간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걷는 걸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의 주차장 진출입이 아주 어렵다(어느 정도 어렵냐면 영화를 잘 보고 있는 와중에, 주차장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 솟아올라 등골이 오싹해진다). 이보다 더 좁을 순 없는 나선형 통로를 하염없이 내려가서 맨틀을 지나 외핵쯤 다다랐을 때 주차공간이 등장한다. 이 동네 특성상 주말에는 방문객이 적어 외핵에 주차 가능하지만 주중에는 다시 그 좁디좁은 통로를 내려가서 내핵까지 도달해야 한다. 이쯤 되면 설계자를 증오하기보단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던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다. 이러한 이유로 차를 가져가는 것을 저어하게 되지만, 지난 몇 번의 탈출 경험을 믿고 운전대를 잡았다. 폭우 앞에서는 경험도 소용없으니.


  (무사히 도착했다. 휴.) 이번에 볼 영화는 <러브 라이즈 블리딩>. 뜬금없지만 가수 태진아 씨의 이름은 당시 최고의 가수였던 '태'현실, 남'진', 나훈'아'의 한 글자씩을 따와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자칫하면 '나태남'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러브 라이즈 블리딩>도 이 시대의 가장 강렬한 단어 세 개를 가지고 와서 만든 제목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세 단어 안에서 기승전결이 완성될 정도로 그 관계가 긴밀하다(실제로 이 영화는 이 세 단어로 요약 가능하다). 그렇기에 영화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스크린 전체를 꽉 채우며 등장하는 타이틀 Love Lies Bleeding 은 이 영화가 얼마나 강렬한지를 알리는 하나의 경고문처럼 보였다(관객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Love Lies Bleeding


  루(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매니저로 일하는 짐(Gym)에 보디빌더 잭키(케이티 오브라이언)가 찾아온다. 둘은 첫 만남부터 사랑에 빠져 동거를 시작하고 잭키는 루에게 보디빌더 대회가 열리는 라스베가스에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루는 JJ(데이브 프랭코)의 폭력에 시달리는 친언니 베스(지나 말론)를 지키기 위해 그곳을 떠날 수 없다. 

출처 : 네이버

  다시 한번 JJ에게 심한 구타를 당하여 혼절한 언니와 이 모든 것의 원흉인 아버지 랭스턴(에드 해리스, 부연하자면 <트루먼 쇼>의 원흉)을 보며 루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자신의 무력함에 절규한다. 그녀를 옆에서 지켜본 잭키는 루의 차를 몰고 베스의 집에 잠입, JJ를 거실 테이블에 처박아 살해한다. 그리고 죽은 JJ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잭키는 천장에 닿을 만큼 커져 있다. 잭키는 루를 위한 거인이 된다.


언니의 집 앞에서 없어진 자신의 차를 발견하고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간 루는 죽은 JJ와 넋이 나간 잭키를 발견한다. 루는 잭키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 시신을 JJ의 차에 실어 (사연 많은) 협곡 아래로 추락시킨다. 이곳이 어디냐고 묻는 잭키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루는 말한다.

 "그냥 내말 듣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이번에는 루가 잭키를 지키는 기사가 된다.

출처 : 네이버

  영화에서 그녀들의 변신은 한 번 더 반복된다. 잭키는 루를 위해 두 번째 살인을 저지르고 루는 잭키를 위해 그 살인의 흔적을 지운다(마지막에는 그녀 역시 살인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 루는 랭스턴을 찾아가지만 오히려 그의 총에 맞아 위기에 처한다.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한 그 순간, 릴리풋의 걸리버처럼 거대해진 잭키가 나타나 랭스턴을 풍뎅이 잡듯 가볍게 제압한다.


  지나간 사랑에 아직 미련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랑으로 인해 변한 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결국 나를 이전과 다른 존재로 변하게 만드는 무엇인데, 끝내 변신을 이루지 못했거나 변신한 나를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면(이건 용기가 없어서일 수도 있고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물론 내 경우처럼 멍청해서일 수도 있고.) 그 사랑의 끝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런 사랑 뒤에는 '진짜 나를, 혹은 나의 진심을 보여주지 못했다'라는 미련한 미련이 사랑의 빈자리를 대신한다. 

사실 루와 잭키의 사랑은 광폭하고 위태롭다. 잭키 스스로도 그녀의 동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넌 사랑에 빠지지 마. 알았지? 너무 아파."

그렇지만 사랑 때문에 거인이 되고, 사랑 때문에 그 거인을 지키는 기사가 되는 그녀들을 보면 잊고 있던 사랑의 또 다른 모습,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사랑의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I love you"가 아닌 "I f*cking love you" 말이다.

I f*cking love you(좌), I love you(우)

  그 대상이 무엇이든 사랑하는 것을 지키고 싶다는 꿈이 생기고, 동시에 나를 지켜주는 무언가가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면 세상의 어려움쯤이야 내 발밑에 있는 개미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까짓 것 폴짝하고 뛰어넘어 버리면 된다. 거인이 되어 손을 잡고 구름 속을 달리는 루와 잭키처럼 말이다.


  영화가 끝나고 무사히 주차장을 빠져나오자(휴.) 아니나 다를까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런 사랑 영화에 이런 날씨라니. 이래서 밤극장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바뀔 듯 바뀌지 않는 신호를 기다리며 앞으로 폭우의 여름밤을 만나면 나는 오래도록 이 영화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폭우 속에서 서로를 살뜰히 지켜주는 한쌍의 거인과 기사와 함께.




이전 06화 친절함은 어쩌면_<프렌치 수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