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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oniist Jul 17. 2024

친절함은 어쩌면_<프렌치 수프>

* 이 글에는 영화 <프렌치 수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여름이 된 후 매주 한 번씩 밤극장을 찾고 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여름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어릴 적, 너무 더운 여름밤에는 부모님 손을 잡고 동네 제과점에 갔다. 그곳에서 투박한 얼음, 알록달록한 젤리, 달콤한 팥이 투명한 그릇에 수북히 담긴 팥빙수를 먹곤했는데 여름의 밤극장으로 향하는 지금 내 기분이 그때와 비슷하다.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이번 영화는 <프렌치 수프>. 7월 9일 밤 10시 5분 영화였고 상영관은 박찬욱관이었다. 박찬욱관에서 영화를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상영관 앞에 그의 영화 관련 소품 및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스크린 위로 지나가는 광고들을 보았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딴 상영관에서 영화를 보는 감독은 어떤 느낌일까? 추가로 박찬욱 감독이 아닌 다른 박찬욱 씨들은 이 상영관에서 어떤 느낌일까? 와 같은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영화가 시작되었다.

출처 : 네이버

프렌치 수프


  1885년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 <프렌치 수프>는 20년간 함께 한 요리연구가 도댕과 요리사 외제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이 둘 외에도 미식가이자 대식가인 도댕의 친구들, 맛을 느끼는데 천재적인 소녀 폴린과, 뭘 나르는데 천재적인 소녀 비올레타가 등장한다). 아름다운 빛과 색감으로 모든 장면이 르누아르나 모네의 그림처럼 느껴지는 이 영화에는 이렇다 할 사건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의 자리에는 음식이 만들어지는 모습이 차지하고 있고 대사의 자리에는 음식이 만들어지는 소리가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장면들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느껴진다. 음식을 만든다는 건 전에 없던 것이 생겨나는, 어떤 사건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에 관객에게 유사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도댕의 친구들을 위한 음식을 요리하는 외제니와 두 소녀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이후 음식을 먹은 도댕의 친구들이 식당에서 내려와 외제니에게 왜 같이 식사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녀가 대답한다. 


"저는 여러분이 드시는 음식을 통해 대화해요."


신중하게 고른 재료를 정성스럽게 요리하여 음식을 만드는 것이 발화라면 그 음식을 맛있게 먹음으로써 대화가 완성된다. 최근에 내가 먹은 것들 중에 대화라고 할만한 음식이 있었나. 미식의 세계를 동경하진 않지만 음식을 요리하고 먹는 행위가 갖는 진중한 의미가 내 요즘의 식사에서 상실된 것은 맞는 것 같다. 포식 뒤에 따라오는 헛헛함의 원인이 그것일지도 모르고.


  음식을 통한 대화는 몸이 아픈 외제니를 위해 도댕이 직접 만찬을 대접하는 모습에서 절정에 이른다. 도댕은 주방에서 요리한 음식을 식당으로 올려보내며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한다. 외제니는 식당에서 도댕이 만든 음식을 먹으며 그의 진심을 듣는다. 여기에 말은 존재하지 않지만 둘은 완벽히 대화한다. 그리고 외제니는 줄곧 외면했던 도댕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이 장면에서 두 배우의 연기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도댕과 외제니의 관계를 궁금해하면서도 결국 그들이 지키고 있는 거리감에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그 이유는 그 거리감이 도댕과 외제니를 동등한 위치에 자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도댕은 늘 외제니를 존중하고 외제니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를 몹시 원하지만 20년의 기간 동안 둘은 거리를 지키며 말 그대로 친절한 관계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둘의 진심을 곡진하게 전해준다.


  '사랑은 사라져도 친절은 남는다'라고 말한 것이 커트 보네거트였던가라고 말한 것이 무라카미 하루키였던가. 현대사회에서 '친절'이라는 단어가 서비스업이라는 카테고리에 갇혀버리면서 숙고의 대상에서 제외된 감이 없지 않지만 친절은 어쩌면 사랑보다 세고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만들었던 모든 갈등 속에 친절함을 더했다면 그렇게까지 잔인한 결과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리고 있는 '다다다' 속 캐릭터 회용은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온 인물이다. 간절히 원하여 어렵게 돌아온 과거에서 그는 사람들을 찾아가 용서를 구한다. 가끔 독자들께서 회용이가 구체적으로 어떤 잘못을 했는지 물어보곤 하시는데 솔직히 그것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자신이 친절하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친절하지 못해 타인에게 남겨놓은 잔인한 상처들을 과거로 돌아와 지우려는 것이다.


모든 관계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곳이 아무 허물 없이 서로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관계는 아닐 것이다. 허물이 없다면 오히려 상처를 주기도 받기도 쉽다. 어쩌면 둘 사이에 투명한 막이 존재하여 그 막을 넘어서거나 찢으려고 하지 않는, 그런 친절함이 남아있는 관계가 더 이상적인 관계일 수도 있다. 외제니가 도댕의 청혼에 대한 승낙을 생의 마지막 밤으로 미뤄둔 것도 그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의 마지막 장면. 외제니와 도댕이 식탁에 마주 앉아 있다. 외제니가 도댕에게 묻는다.

 '나는 당신의 요리사인가요, 당신의 아내인가요?'

도댕은 대답한다.

 '나의 요리사.'

이것은 결혼 이후에도 둘의 친절한 관계가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그녀를 소유하지 않겠다는 도댕의 약속이다. 외제니가 가장 사랑한 것은 도댕의 재치가 아니라 친절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당연하게도 프랑스 음식들을 먹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니 라따뚜이, 뵈프 부르기뇽, 솔 뫼니에르처럼 내가 아는 프랑스 음식들은 전부 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번 영화를 통해서도 프렌치 수프 '포토푀'를 알게 되었다. 극장의 냉방이 쌀쌀해서 어딘가에 들어가서 따뜻한 수프를 먹고 싶었지만 늦은 시각이라 쇼핑몰의 모든 가게들은 문이 닫혀있었다. 게다가 밖에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여름밤은 딱 그 정도로만 나와 친절한 관계를 유지하기로 했던 것이다. 밤극장에 가는 정도로만. 그렇다면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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