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수고에게

by ZANN


스파이 소재는

시대를 불문하고 언제나 환영받는

흥행 보증 수표이지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불가능한 듯한 임무 수행,

세계 곳곳을 누비는 화려한 모험담,

완벽한 수트핏과 매력적인 외모를 겸비한 주인공까지.

도저히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수많은 액션과 첨단 장비라는

화려한 포장지를 한 꺼풀 벗겨내야

비로소 진정한 스파이의 매력이 드러납니다.


그건 바로

지켜야 할 무언가를 위해

자신을 지운 채 끝까지 맡은 바를 수행한다는 점.


고독한 완수.


어쩌면 스파이의 또 다른 정의는

바로 이 다섯 글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그림자가 되어 움직이는 스파이처럼

여러분의 하루하루 또한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치열한 작전의 연속이었을 거예요.


그 고독한 전쟁터를 묵묵히 버텨내며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한 저마다의 쓰디쓴 속내.

때로는 너무 무거워서 혹은 너무 사소해서

차마 뱉지 못하고 삼켜야만 했던 마음들이 참 많았지요?


오늘 이 시간부터,

저는 여러분의 비밀을 수신하는

스파이가 되어 보려 합니다.


꼭꼭 숨겨두었던 당신의 진심을

하나하나 기록하고 들어드리는 조용한 미션.

밤이 깊을 때까지, 제가 꼭 완수해 볼게요.




‘문이 열립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추리 적중률 100%인 소녀 탐정에 빙의한다. 지금부터 현관문 틈새를 비집고 새어 나오는 신호를 토대로 수사를 시작하지. 은은히 깔린 온기 어린 내음에 칼칼하고도 개운한 숨결과 짭조름한 잔향이 모든 진실을 자백하고 있군.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저녁 메뉴는 쌀밥과 김치찌개 그리고 자반 고등어구이가 분명해! 신속하게 도어락 비밀번호를 해제한 뒤 문을 열고 입장. 왼쪽으로 꺾어 거실로 이어지는 짧은 통로를 지나고 나면 분주하게 움직이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영화나 소설 속 스파이들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지운다. 현실보다는 허구와 찰떡인 존재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 곁에는 이미 평생을 이름 없는 언더커버 요원으로 살아온 인물이 있다.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의 주인공이다. 엄마는 아침 해도 셔터를 올리기 전인 새벽에 누구보다 발 빠르게 작전을 개시하고, 모두가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가장 늦게까지 불을 밝히며 하루의 잔해를 정리한다.


현관문 밖의 엄마는 다정하고도 냉철하게 삶의 변수를 지휘하는 전략가이지만,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가족이라는 요새를 지키는 온화한 파수꾼으로 얼굴을 바꾼다. 때로는 축 처진 내 어깨의 각도만으로 상태를 꿰뚫어 보는 셜록이 되기도 하고, 무언가를 부탁하기도 전에 마음의 허기를 채울 위로를 적재적소에 꺼내놓는 큐레이터가 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내가 되도록 가시밭길을 비껴가며 걸어온 인생의 모든 순간은, 엄마라는 베테랑 스파이의 치밀한 작전에서 비롯된다.


그 과정은 철저히 수면 아래에 있기에 엄마가 겪은 고단함이나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배어든 궂은 흔적들은 결코 공개 보고서에 올라오는 법이 없다. 자신의 수고와 더불어 취향과 꿈 따위는 기밀 서류함에 깊숙이 넣어둔 채 안팎으로 고군분투하는 엄마는 걸어 다니는 ‘고독한 완수’ 그 자체다.


가끔 엄마의 젊은 시절이 담긴 앨범을 펼쳐 본다. 누군가의 엄마가 되기 전, 자기 자신으로서 환하게 웃고 있는 여성이 가득하다. 한때는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 빛나는 꿈을 꾸었을 청춘. 이제는 가족의 평화라는 일 순위 미션을 위해 기꺼이 그림자를 자처하는 영웅. 엄마는 그 어떠한 영화나 소설 속 주인공보다 위대한 작전을 성공시켜 왔다.


나도 엄마를 지키는 스파이가 되어야지. 작은 돌멩이 하나 튀지 않게 할 거야. 굳게 다짐해 보지만 이미 스파이 명예의 전당 반열에 오른 경지인 엄마를 속이기란 쉽지 않다. 아마 내가 어설프게 비밀 작전을 펼칠 때면 엄마는 이미 한발 앞서 모든 움직임을 간파하고 있을 거다. 그러면서도 자식의 기특한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끝까지 모르는 척하며 속아주는 고난도 미션을 또다시 훌륭하게 완수해 낼 터. 차마 흉내 내지도 못할 깊은 내공 앞에서 나는 늘 고개를 숙인다.


오늘도 살림과 서류 사이에서 고군분투했을 엄마의 뒷모습을 응시한다. 주방에서 들려오는 달그락 소리가 유난히 묵직하다. 인기척이 미묘하게 느껴졌는지 예고 없이 뒤를 돌아본 엄마가 나를 발견하고 환히 웃는다.


국가에서 수여하는 화려한 훈장은 없지만 엄마의 눈매와 입가에 자리 잡은 미소는 삶이 부여한 가장 고귀한 훈장이다. 숱한 세월을 버텨온 끝에 피어난 빛나는 훈장을 보며 나는 되뇐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당신의 치열했던 나날들을, 적어도 나는 잊지 않겠다고. 당신의 비밀 작전 덕분에 오늘의 내가 이토록 평온하고 행복하다고 말이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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