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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비행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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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옂 May 18. 2024

비행, 외로움과 별과 나와

게스트하우스는 방음이 안 돼 잠을 설쳤다. 간신히 여덟 시간을 채워 잠을 잔 후엔 아침을 먹으러 내려갔다. 아무도 없는 주방에서 혼자 식빵을 세 개 구워 먹었다. 오렌지주스도 있었다. 이 정도면 아침으로 썩 훌륭했다.

나갈 채비를 마친 내게 주인아주머니는 오늘은 어딜 갈 거냐고 물어보셨다. 무슨 마을도 좋고 남산이나 바다도 좋다고 추천해 주셨다. 누가 봐도 혼자 여행 온 것 같은 나를 보고 열심히 설명해 주셨다. 경주에도 바다가 있는지 몰랐다. 감사하다고 배꼽인사까지 하고 나왔다. 나와서 지도를 켰는데 생각이 나질 않았다. 죄송스러웠다.

아침부터 바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체크아웃과 동시에 스타벅스에 왔다. 경주까지 와서 무슨 스타벅스냐 하겠지만 나는 스타벅스가 좋다. 그렇다 할 감성 카페는 이제는 수도 없이 많아져 어디를 가든 대동소이할 뿐이다. 더 중요한 건 나에겐 얼마 전 생일 선물로 받은 스타벅스 기프티콘이 있었다. 가난한 여행에 중요한 요소다.

스타벅스에 오는 길에 무인 빈티지 샵이 있었다. 이십사 시간을 운영한다는 무인 빈티지 샵엔 정말 아무도 없었다.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는 봤어도 무인 빈티지 샵은 처음 본다. 오천 원짜리 옷들이 걸려 있었는데, 오천 원을 줘도 안 입을 옷들뿐이었다. 쳐다보는 직원도 없겠다 싶어 삼만 원짜리 청자켓을 한 번 걸쳐봤다. 조용히 다시 걸어두고 왔다.

스타벅스에서 일기를 쓰다 보니 배가 고파졌다. 이번엔 또 무얼 먹을까 하던 중 김밥을 먹고 싶어졌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나는 김밥을 좋아한다. 먹기 간편하면서도 맛도 있고 배도 꽉 차기 때문이다. 이런 여행에서는 포만하게 먹어야 한다. 황리단길에서 유명하다는 우엉 김밥을 먹으러 갔다. 우엉같이 생긴 오징어채가 잔뜩 올라가 있는 김밥이었는데 두 줄에 구천오백 원이었다. 어쩌겠는가 나는 오징어채도 만들 수 없고, 김하고 밥도 없기 때문에 달라는 대로 줘야만 했다. 아마 더 비싸도 군말 없이 돈을 내고 왔을 것이다. 여행지에서의 소비란 대개 그렇다.

김밥을 사서 대릉원에 가서 앉았다. 대충 아무도 없을 것 같은 데 앉아서 먹었는데 조용하고 좋았다. 경치도 괜찮았고. 사실상 무덤 앞에서 먹는 꼴인데 묻혀 있는 왕들과 함께 먹는다고 생각하니까 별로 외롭거나 초라하진 않았다. 코가 좀 시렵긴 했지만 이 또한 혼자 오는 여행의 묘미라고 생각했다. 사진을 찍는 커플들이 돌아다녔다. 저 커플들은 이렇게 무덤 앞에서 유튜브 보면서 밥 못먹겠지 하며 김밥을 두 개씩 욱여넣었다. 김밥은 두 개씩 먹는 게 맛있다. 다들 꼭 기억해 두면 한다.

밥을 먹던 와중 어떤 분이 내게 시간을 물었다. 처음엔 이 시간대에는 음식물을 먹으면 안 되는 줄 알고 죄송하다고 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정말 시간이 몇 시인지 물어봤던 거였다. 사실 음식물을 먹는 데 시간이 어디있나. 몇 시간 동안 말을 하지 않고 있던 나는 삑사리가 날까 봐 목을 한 번 가다듬고 말했다. 오후 시간대에 먹으면 안 되면, 새벽에도 먹으면 안 될 것이다. 괜히 문화재 앞에서 밥을 먹는 스스로가 당당하지 못했던 것 같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사람하고 대화할 일이 없으니 이런 한마디의 대화도 기억에 남는다.

헌책방에 갔다. 헌책방 이름은 ‘봄날’이었는데 청주의 우리 집 이름과 같아 안 가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책더미에서 구십년대에 쓰였던 중국 시집과 세 얼간이를 읽었다. 세 얼간이는 읽다가 다 못 읽어서 사 왔다. 오천 원이었다. 기념품으로 세 얼간이를 사가는 나의 모습… 멋지다.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었다. 다음은 뭘 할까. 관광지로서 경주는 생각보다 할 게 많이 없었다. 서라벌네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본 현수막에는 오늘부터 전시를 시작하는 예술의전당 홍보물이 붙어있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지도를 켰다. 버스로 이십 분이 걸리는 예술의전당으로 갔다. 계획이 없으니 걱정할 것도 없다. 이런 여행도 꽤 재밌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게, 처음 가보는 장소에서는 계획을 세우기가 힘들다. 물론 어느 정도는 계획을 세울 수 있겠지만 잘 알지 못하는 도시에 문화를 어떻게 다 알고 계획할까 싶었다. 또 하나 배워갈 수 있었다. 이런 배움이야말로 발로 뛰며 겪는 배움이구나 싶었다. 이런 배움조차 계획하지 않았는데, 재밌다.

예술의전당을 가는 길엔 큰 하천이 있었는데 청주의 무심천과 비슷했다. 한강 둔치와도 별다를 게 없었다. 우리나라 어디를 가든 느껴지는 건 결국 다 비슷비슷하다는 것이다. 시장에 가면 청주의 육거리시장이나 제주 오일장하고 비슷한 느낌이고, 시골 동네에 가면 어릴 때 할머니가 살았던 동네를 보는 것 같다. 경험이 많아질수록 비교군이 많아지게 된다.

전시회는 모네부터 앤디 워홀까지 삼백 년의 역사를 담은 그림들이었다. 열흘간 무료로 개장한다길래 싱글벙글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 층을 눌렀다. 예술의전당엔 그 전시회를 보러 온 사람들뿐이었다. 그림에 일가견이 없어 대강 훑어보고 말았다. 처음엔 꼼꼼히 보다가 봐도 봐도 모르겠는 마음에 나중에 가서는 이름을 들어본 작가의 그림만 몇 개 봤다. 네덜란드의 경제 호황기라고 하던 시기에 그려진 그림들은 다 채도가 낮았다. 시간이 지나서 색이 바랜 건지, 그 시절에는 어두컴컴하게 그리는 게 유행이었던 건지, 아니면 풍요 속의 빈곤을 표현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렇게 호화롭지 않았던 건지 잘 모르겠다. 알려줄 사람이 없으니 그냥 추측이나 할 뿐이다. 낙서처럼 그려둔 그림도 있었고, 누가 봐도 작품이구나 싶은 것들도 있었다. 만 원이나 하는 전시를 공짜로 봤으니 그것만으로 만족하고 예술의전당을 빠져나왔다.


빨리 숙소에 돌아가 쉬고 싶었다. 잠을 이틀이나 제대로 못 잔 탓에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오늘 숙소는 혼자 쓸 수 있는 곳을 잡았다. 어제보다 만 오천 원이나 비싼 숙소였는데 그래봤자 삼만 원이 조금 넘었다. 화장실도 방 안에 있고 잠도 혼자 잘 수 있는 곳이라 만족스러웠다.

야경을 보러 동궁과 월지를 갔다. 처음 들어보는 곳인데 유명하단다. 안압지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안압지는 들어봤지. 아마 초등학교 역사 시간일 것이다. 처음으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는데 몇 명이냐는 질문에 한 명이라고 말했다. 혼자서도 방방곡곡 잘 돌아다니는 스스로가 기특해 죽을 지경이었다. 분명 이틀 전 까지만 해도 제일 걱정하던 게 이런 거였는데. 경주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야경 명소는 감히 그럴 만했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가득했는데 충분히 가득할 만한 관광지였다. 빽빽하면서도 성글게 지어진 건물들의 배열은 걷기에 더 할 나위 없이 좋았으며, 고혹적이면서도 단아한 건축물들은 정말이지 어떤 모습보다도 아름다웠다. 호수에 비친 건물들의 모습은 감탄만 나올 지경이었다. 수많은 연인과 가족들 사이에서 혼자 걷는데도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한 바퀴 더 돌까 했는데 한 번 더 돈다고 해서 전처럼 똑같은 기분이 들진 않겠지 싶었다. 나중에 꼭 누구 데리고 와야지.

혼자 야경도 보고 왔겠다 내친김에 혼자 맥주도 마시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난 지금까지 혼자서 술을 마셔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자주 마셨으면서도 혼자서는 마시지 않았던 것이다. 나를 사랑하기는커녕 날 쳐다도 보지 않았던 지난 시간이었다. 다시 한번 날 사랑해야지 하는 마음을 갖게 된 계기였던 것 같다. 살다 보면 그렇다. 별것도 아닌 일에 갑자기 의미를 부여하고선 불현듯 무언갈 깨닫는다.

오늘 경주의 밤하늘은 흐리멍텅했다. 수놓은 듯한 별빛들은 물론이거니와 별똥별을 기대했던 밤하늘과는 달리 간신히 보이는 초승달과 화성인지 금성인지 모를 별 하나뿐이었다. 경주가 유독 별이 잘 안 보이는 건지, 제주도가 잘 보이는 건지, 미세먼지의 문제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건지는 모른다. 아마 다음에 경주에 올 때까지 모르겠지.

나는 별 보는 걸 좋아한다.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 별을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어떤 풍경보다도 아름다운 별자리는 하늘이 준 선물과도 같다. 좋아하는 마음과 다르게 볼 줄 아는 별자리는 북두칠성과 오리온자리뿐인데 유독 오리온자리를 찾아보는 걸 좋아했다. 별자리의 허리춤에 연달아 붙어있는 세 개의 별을 찾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별은 내게 있어서 제주도를 사랑하게 되는 몇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겨울철 맑은 제주의 밤하늘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우니까. 외로운 제주도에서 살아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니까.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느낄 때 밖으로 나가 머리를 뒤로 재껴서 별을 본다. 십 분이고 이십 분이고 목이 꺾어질 때까지 본다. 그렇게 오랫동안 보면서 무얼 느낀다기보단 그냥 예뻐하고 말지만 작은 예쁨과 별을 보며 했던 생각들을 마음속에 쌓아 올릴 뿐이다.

오늘은 그 오리온자리조차 보이질 않는다. 내일은 비가 오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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