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지막하게 내려앉은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았다. 오늘은 또 뭘 할까. 경주 시민이 보면 우습겠지만 난 경주를 다 둘러봤다. 그리고 내 글은 경주 시민이 볼일도 없다. 경주에는 시외버스터미널과 고속버스터미널이 붙어 있는 것도 알고, 대부분의 건물은 기와로 지붕을 올렸다는 것도 안다. 황리단길에는 십원빵 가게가 열 개도 넘게 있는 것도 알고, 지역번호가 054인 것도 안다.
경주는 실로 아름다운 도시다. 천 년도 더 된 과거의 모습과, 관광지로서 지금의 모습을 조화롭게 잘 섞어 구현해 둔 경주는 경주 자체를 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둘 만했다. 아름다운 도시인 경주에서 이젠 도무지 할 게 없어서 경주를 떠나기로 했다. 고작 사흘 있어 놓고서 떠난다는 표현이 우습긴 하지만 떠나는 건 떠나는 거니까.
이번엔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써브웨이에 가고 싶었다. 걸어서 일 킬로미터 거리에 써브웨이 경주중앙점이 있었고, 오십오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써브웨이 동성로점이 있었다. 어차피 내일 대구공항으로 갈 건데 하루 더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일 킬로미터를 걸을 바엔 오십오 킬로미터를 버스 타는 게 나았다. 하루만큼 대구를 더 잘 알 수 있겠지 싶었다. 목적지를 정한 나는 거침이 없었다.
시외버스터미널로 가던 중 앞에 있던 사람의 입김이 크게 났다. 나도 혼자서 입김을 후- 하고 불어봤다. 그 사람만큼 크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그 사람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버스의 삼 번 좌석이 좋다. 맨 앞자리에서 도로가 훤히 보이는 좌석인데, 우등 버스를 타면 혼자 앉기까지 할 수 있는 완벽한 자리다. 위험하다고 소문이 난 좌석이기도 하다. 앞이 텅 비어있는 자리이기에 정말 혹여나 사고가 나면 버스의 앞 유리를 깨는 건 내 머리통일 것이다. 난 안전벨트를 꼭 맸다. 기사님의 안전운전을 기도했다. 버스 안에서도 일기를 적었다. 앞사람의 담배 연기처럼 문득문득 스치는 순간들은 쉽게 잊히기 때문이다. 강인함의 상징인 나는 밤잠을 설쳤음에도 똑딱똑딱 일기를 적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동대구터미널이었다.
난 써브웨이의 메뉴에는 일종의 정답이 있는 줄 알았다. 이 또한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데서 시작된 생각이었던 것 같다. 먼저 이탈리안 비엠티를 시킨 후에 빵은 어떤 빵을 고르고 소스는 뭘 달라고 하는… 슈레드치즈를 고르면 병신이고, 어니언 소스 같은 걸 고르는 사람은 손가락질받는 줄로만 알았다. 나는 쉬림프에 아보카도를 추가해서 먹을 생각이었다. 일기를 쓰면서 생각난 건데, 아보카도를 까먹고 추가하지 않았다. 일기를 쓰지 않았으면 평생 아보카도를 추가하고 먹은 줄 알았을 것이다. 일기의 순기능이다. 쉬림프 샌드위치는 써브웨이 내에서도 프리미엄으로 분류되는 샌드위치였다. 어쩐지 비싸더라 싶었다. 맛은 있었다. 칠천 원이 넘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적는가 하면,
어차피 아무도 안 읽기 때문이다. 이따금씩 지인들은 내게 글을 잘 쓴다고 해주곤 한다. 너의 글은 재밌다고 자주 올려달라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가끔 작가가 되는 건 어떠냐는 제안을 덧붙이는 사람들도 있다. 봐라, 이게 내 글이다. 재미도 없지 하하. 나라도 남의 일기 말고 넷플릭스나 보겠다. 만 오천 자가 넘는 비행은 이젠 아무도 읽지 않는다. 읽는다고 한들, 첫 문단과 끝 문단을 대충 읽고선 예의상 댓글을 남겨주는 정도이다. 보여주기 위해 일기를 적는 게 아니다. 자랑하기 위해 비행을 시작한 게 아니다. 스스로 만족스러운 글이면 된다. 부끄럽지 않을 글이면 충분하다.
대구는 실로 광역시가 맞았다. 평일임에도 동성로에는 사람이 가득했으며, 디스코팡팡 옆에서는 중고등학생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무신사 스탠다드도 있었고, 더현대도 있었다. 스타벅스도 두 개나 붙어있었고, 파타고니아 매장도 있었다. 인구수가 이백 만이 넘는 도시의 시내는 다르긴 다르다. 경주보다 열 배나 많은 인구수를 가진 대구와 경주를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름도 모를 소품샵이 번쩍번쩍하게 지어져 있길래 홀린 듯 들어가 봤다. 볼 것도 없던 곳에서 삼십 분이나 있었다. 재미도 없는 소품샵에서 이것저것 사다 보니 삼만 원을 넘게 썼다. 충동구매도 여행의 묘미겠지 하며 가뜩이나 무거운 짐에 짐이 더해졌다.
대구에 오면 꼭 가고 싶었던 곳이 있었는데, ‘스테이블스토어’라는 이름의 편집샵이다. 재작년 가을, 사고 싶은 신발이 스테이블스토어에 재입고된다는 소식을 듣고 인스타그램 메시지를 보냈다. 많은 사람들이 찾던 신발이어서 입고 되자마자 품절이 될 걱정 때문이었다. 혹시 몇 시에 재입고되는지, 물량은 얼마나 되는지 하는 내용을 물어봤던 것 같다. 몇 시에 재입고가 되는데, 고객님 수량은 하나 남겨두겠다는 답장이 왔다. 진짜 남겨둘 심산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너무 고마운 답장이었고, 지금까지도 가장 아끼는 신발로 신고 있다. 그 신발은 아직까지도 품절이 되지 않았다.
스테이블스토어는 다음 주에 영업이 종료된다고 했다. 어쩜 이렇게 타이밍이 맞을 수 있지 싶은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사실 가방이 무거워 한달음은 아니고 중간에 좀 쉬었다 갔다. 생각보다 크기가 작았고, 취향에 잘 맞지 않았다. 나름의 추억을 가지고 기대한 가게 치고는 아쉬운 결말이었다. 공허한 기분이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동성로에 온 이유는 없었다. 대구 하면 떠오르는 게 동성로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가고 싶던 스테이블도 다녀왔고, 동성로도 와 봤다. 더 이상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걷다가 눈에 보이는 카페에 찾아 들어가 밀크티를 시켰다. 커피를 두 잔이나 마신 탓이다. 체크인 시간도 남아 카페에 가만히 앉아 일기를 썼다. 이쯤 되면 일기 쓰려고 온 것 같았다. 일정도 없는 여행에서 뭐 어떤가. 내가 쓴 글이나 한 번 더 읽었다. 재차 적어두지만 아무도 안 읽기 때문이다. 뒤에 있는 사람들이 소개팅 중이었다. 귀를 활짝 열고 일기는 쓰는 척만 했다.
며칠째 잠도 잘 못 자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 온종일 돌아다닌 탓에 배고픈 줄도 몰랐다. 편의점에서 도시락이나 사먹고 싶었다. 여행에서 도시락이 웬말이냐 싶겠지만 이 또한 혼자 오는 여행의 묘미지 하고 숙소로 걸어갔다. 적다 보니 ‘묘미’란 단어를 많이 쓰게 되는 것 같은데 평상시에 자주 쓰지 않는 단어를 쓰는 것도 묘미인 것 같다. 앗, 또 썼다.
숙소로 가는 길에 있던 정육점에서 당일 도축 뭉티기를 수요일만 판매한다는 현수막을 봤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하고 달력을 보니 수요일이었다. 순식간에 저녁 메뉴가 바뀌었다. 나름 대구에서 이름 좀 날린다 하는 음식 아닌가 싶어 곧장 정육점으로 향했다. 혼자 먹을 건데 얼마가 적당하냐고, 이백 그램이면 충분하단다. 정육점 아저씨는 혼자 여행 온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동성로는 가봤냐고 했다. 그렇다고 했다. 그럼 이제 뭉티기 사서 숙소에서 혼자 먹는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낭만 넘친다더라. 낭만은요 아저씨, 당신처럼 매일 같이 열심히 살아가시는 아저씨가 더 낭만 있습니다 하려다 말았다. 그냥 감사하다고 할 뿐이었다.
대구는 경주에 비해 사투리가 심하다. 몇 마디 안 해봤지만 직원들이랑 한두 마디 대화를 나눠보면 느껴진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이 정도 억양으로 사투리를 쓸 정도면 얼마나 심할지 예상이 간다. 미디어에서 보던 경상도 사투리를 실제로 들으니까 신기했다. 어디를 가나 사투리가 들렸고, 경상도에 온 걸 실감했다.
편의점에서 맥주와 먹을거리를 사와 숙소에 들어왔다. 알고 보니 숙소가 약간 러브모텔 같은 곳이더라. 엘리베이터엔 떡하니 성인용품을 파는 곳이 적혀있고, 객실 내부는 어두컴컴했다. 있는 불을 다 켜봐도 무드등 하나를 켠 것 같았다. 상관없었다. 난 사랑을 나눌 사람은커녕 저녁을 함께 먹을 사람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어두워서 글씨를 보기가 좀 불편하긴 했다.
오늘 도축했다는 뭉티기는 맛있었다. 별다른 거창한 표현을 적을 말이 없다. 그냥 생고기에 소스를 찍어 먹는 음식이다. 동궁과 월지처럼 드라마틱한 놀라움이 있지도 않았고, 눈이 번쩍 뜨일 맛도 아니었다. 그냥 고소할 뿐이었다. 힘줄인지 근막인지 때문에 몇 개는 질겨서 뱉었다. 조금 덧붙이자면 혼자서 이백 그램은 좀 많았다.
걱정이 무색하게 잘 돌아다녔고, 외롭다고 울지나 않았으면 했는데, 울기는커녕 작은 추억들을 잔뜩 모아 마음속에 꼭꼭 담아두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방에서 혼자 맥주를 마신다. 혼자 재즈를 한껏 틀어놓고 하루의 비행을 마무리한다. 마지막 밤을 보낸다. 잊지 못할 추억을 채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