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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어린 송아지가 부뚜막에 앉아 울고있어요

영화 <버닝> 리뷰

by 그린
기본 정보

장르 미스터리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러닝타임 148분

감독 이창동

출연 유아인, 스티븐 연, 전종서

시놉시스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유아인)는 배달을 갔다가 어릴 적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해미(전종서)를 만나고, 그녀에게서 아프리카 여행을 간 동안 자기가 키우는 고양이를 돌봐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여행에서 돌아온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만난 벤(스티븐 연)이라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종수에게 소개한다. 어느 날 벤은 해미와 함께 종수의 집으로 찾아와 자신의 비밀스러운 취미에 대해 고백한다. 그때부터 종수는 무서운 예감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결말 해석

결말부에서 종수는 벤을 살해한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나뉜다. 종수가 진짜 벤을 죽였거나 종수의 소설 혹은 상상에 불과하거나. 후자로 해석하는 비평이 많지만, 필자는 실제로 종수가 벤을 죽였고, 영화는 종수 자신의 이야기라고 본다. (다만, 영화는 의도적으로 층을 열어 놓아 여러 해석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한다. 정해진 하나의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1) 이야기의 주체는 종수다

영화의 시점은 전편에 걸쳐 종수에 고정되어 있다. 그의 욕망, 질투, 분노가 사건을 끌고 가고, 마지막 결단(벤을 칼로 찌르고 그의 차를 불태움)까지 그가 직접 실행한다. 종수의 소설적 상상력의 끝은 행동으로 귀결된다. 핵심은 종수의 이야기로 응결되는 불확실성의 정서이며, 그가 마지막에 행동으로 귀착시키는 건 그 정서의 종착점이다.

2) 클래식 서스펜스의 구성

종수는 해미에 대한 애정과 박탈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리고 벤을 향한 질투, 적대의 감정은 영화 내내 누적된다. 계급 격차와 대비, 모멸감. 벤은 위험할 정도로 공허한 인물이며, 종수의 분노를 증폭시키는 계급적 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감정의 누적이 최종 폭발로 이어진 것. 또한, 영화 전반에는 칼과 불이 꾸준히 포개진다. 아버지의 칼, 옷과 비닐하우스 불 태우기. 최종 장면의 칼과 방화는 이 장치들의 수렴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가 두 시간 넘게 조립해온 범행 가능성의 필연적 출력이다.

3) 해미의 실종과 종수의 확신

해미의 고양이 보일이가 벤의 집에 있는 듯 암시되는 장면, 벤의 집 서랍 속 여성 소지품 등은 종수에게 유죄의 흔적으로 작동하고, 그의 믿음을 신념으로 바꾼다. 종수의 확신을 행위로 밀어붙이는 엔진.

4) 열린 결말 = 상상?

앞서 말했듯 결말을 종수의 소설 혹은 상상으로 읽는 견해도 강력하다. 다만 그 해석을 택해도 영화 속에서 칼을 꽂고, 옷을 벗고, 차를 불태우는 동작은 온전한 행위의 서술로 제시된다. 영화적 사실 차원에서는 종수가 벤을 죽였다는 것이다. 영화가 축적해 온 감정과 장치, 미행과 대면의 동선이 마지막 장면에서 물리적 행위로 완결된다.

종수는 가난과 불행 속에서 유난히 힘든 현실을 살아가지만 해미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경험을 하고, 자유로운 영혼인 해미는 그에게 절대적 매혹이 된다. 그러나 해미 곁에 태생부터 부유한 벤이 나타나자 종수는 질투와 분노를 쌓아가고, 해미의 실종 이후 그 집착은 살인으로 귀결된다. 사랑과 질투가 빚어낸 현대적 치정극.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프로이트가 제시한 개념으로 아들이 무의식적으로 아버지를 경쟁자로 여기고 제거하려 하며 어머니를 차지하려는 욕망을 품는 심리 구조를 뜻한다. 영화 속에서 종수는 아버지의 폭력성을 칼로 계승하고, 빚더미에 놓인 어머니를 보호하려는 유아적 충동을 해미에게 투사한다. 해미는 사랑과 돌봄의 대상이자 결핍의 상징으로 어머니의 대체물이 되고, 벤은 넘을 수 없는 부와 권력을 지닌 아버지의 대체물로 자리한다. 결국 종수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차지하려는 욕망을 실현한다. 이 영화는 오이디푸스적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미숙한 청년이 사랑과 질투에 휘말려 파국으로 치닫는 치정극으로도 읽힐 수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영화는 한국 사회 속 청춘의 막연한 불안과 설명할 수 없는 분노를 종수라는 인물에 응축해 보여준다. 종수는 가난과 불행 속에서 방향을 잃은 청년으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함께 분노를 쌓아가지만 어디로 향할지 몰라 방황한다. 제도나 사회를 향한 저항을 실행하지도 못하고, 사랑과 관계 속에서도 불안을 설명하지 못한 채 휘둘리며, 그 감정을 벤이라는 인물에게 전이한다. 이와 반대로 해미는 자유롭고 즉흥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낙관이라기보다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체념과 관조에 가깝다. 특히 그녀가 추는 그레이트 헝거의 춤은 삶의 의미를 갈망하는 몸짓이자 동시에 절망의 울음으로 변모하며, 청춘의 불안정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감독은 종수의 분노와 해미의 체념이라는 두 얼굴을 통해 오늘날 젊은 세대가 겪는 실존적 위기를 다층적으로 보여준다.




체념과 관조의 그레이트 헝거

<버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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