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번 출구> 리뷰
작품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8번 출구>는 동명의 공포 게임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지하도를 걷다 보면 가끔 나타나는 이상 현상을 발견하고, 그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거나 되돌아가야 하는 단순한 구조의 게임이다. 감독은 이 반복적인 패턴 속에서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영화는 익숙한 공간의 공포와 루프의 반복을 통해 일상이라는 연옥, 그리고 개인이 사회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이끌어낸다.
앞으로 나아가거나 되돌아가는 단순한 구조의 게임을 어떻게 영화로 풀어냈을까. 영화를 극장에서 봤던 가장 큰 이유였다. 너무 재밌게 봤고, 한 가지 확신한 게 있다. 이 영화는 킬링타임용 공포물이 아니다. 정말 많은 상징과 의미들이 숨겨져 있다.
영화 속 인물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누구의 이야기로 한정되지 않게 하려는 의도다. 익명화된 그들은 우리 사회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집합처럼 보인다. 초반부에 주인공의 시점을 따라가게 하는 이유도, 마치 우리가 직접 게임을 플레이하는 듯한 몰입감을 주기 위함이다. 그는 지하철에서 아이를 꾸짖는 남자를 보지만 모른 체 지나치고, 곧 임신했다는 전 여자친구의 연락을 받는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끝없는 루프 속으로 빠져든다.
지하도는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형태로 구현된 연옥이다. 과거의 죄와 트라우마가 맴돌며, 도망쳐도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는 폐쇄된 공간. 포스터 속 뫼비우스 띠 위를 맴도는 개미처럼, 그는 자기 죄의 궤도를 돌고 있다. 그가 지하도에 갇힌 이유는 ‘무관심’ 때문이다. 곤경에 처한 모녀를 외면했고, 연인의 물음에도 답하지 않았다. 지하도는 그 무심함을 반복해서 되돌려주며, 끝내 그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게임 속 단순한 ‘배경 인물’이었던 걷는 남자는 영화에서 한 사람의 인물로 확장된다. 그는 분노와 폭력으로 가족을 잃은 뒤, 지하도에서 여고생을 만난다. 그녀는 이미 삶을 포기한 듯한 태도로, 아무 의미 없는 일상을 반복하며 타인을 끌어들이는 인물이다. 둘의 만남은 변화와 책임을 잃은 사회의 단면처럼 보인다. 결국 그는 자신의 아들과 닮은 아이를 외면한 채 ‘인간성’을 잃고, 무한한 루프 속에 갇혀버린다.
소년은 주인공의 미래 아들이며, 타인의 고통을 감지할 수 있는 존재다. 그는 어른들이 외면한 이상 현상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아직 남아 있는 인간성을 증명한다. 반대로 어른들은 그저 무감각하게 걷는 행인일 뿐이다. 매일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타인들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둔감해지고, 아이의 울음조차 배경음처럼 흘려보낸다. 우리는 언제부터 귀를 닫았는가.
지하도가 일상의 연옥이라면, 바다는 그것을 집어삼키는 세상이다. 쓰나미 같은 재난이 모든 것을 덮칠 때, 인간은 얼마나 쉽게 삶의 방향을 잃는가. 그래서 우리는 지킬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주인공에게 그것은 소년이었다. 서로를 향한 그들의 여정은 단테의 여정처럼, 절망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기 위한 동행이다. 구원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함께 버티는 누군가에게서 시작된다.
소년은 위로, 주인공은 아래로 향한다. 하나는 미래로 나아가고, 하나는 과거로 되돌아간다. 주인공이 다시 지하로 내려가는 이유는 자신의 죄를 바로잡기 위해서다. 오프닝에서 외면했던 아기의 울음은 그의 마지막 선택을 통해 되풀이된다. 상승과 하강, 두 방향의 길은 서로를 향해 교차하며 결국 하나의 원을 만든다. ‘8’의 형태처럼, 서로가 서로의 출구가 된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의 구원 서사이자, 되돌아감으로 완성되는 순환의 이야기다.
지하도의 반복은 단테의 <신곡>처럼 죄를 씻고 다시 나아가기 위한 정화의 과정이다. 주인공은 그 루프 속에서 무관심의 죄를 자각하고, 스스로의 중력을 바꾼다. 그러나 그가 도달한 곳은 여전히 연옥이다. 천국도, 지옥도 아닌 이 세계는 매일의 일상과 닮아 있다.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도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그 안의 ‘빛나는 순간들’ 때문이다. 그 작은 감각이 바로 우리의 이상 현상이며, 삶을 다시금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삶은 거대한 연옥처럼 이어진다. 라벨의 <볼레로>가 단 하나의 리듬 위에 쌓여가며 불협화음으로 끝나는 것처럼, 우리의 삶 또한 그 반복 속에서 불완전한 화음을 만들어낸다. 영화는 말한다. 때로는 멈추고, 되돌아가야 한다고. 진짜 중요한 건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아니라, 그 방향이 옳은가를 묻는 일이다.
이렇게 꽉 찬 공포 영화는 오랜만이었다. 충분히 무서운데 상징적이고, 메시지도 존재한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새 8번 출구로 나아가는 과정에 동참하며, 주인공과 함께 숙제를 풀고 있다. 마치 내가 갇힌 것처럼 나 역시 8번 출구로 향해가고 있다. 지하도는 우리의 일상과 너무나 많이 닮아 있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 우리는 특별함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간다. 사소한 변화가 있어도 매일 보던 것으로 여기고 스쳐 지나간다. 긴장도, 설렘도, 행복도 희미해진 삶. 영화는 그런 우리들에게 피할 수 없는 쓰나미를 들이밀며, 잊고 있던 일상의 소중함과 반복의 유의미함을 일깨워 준다. 이토록 단순한 게임 소재로 삶의 이야기를 완성해낸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8번 출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