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랑켄슈타인> 리뷰
작품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스카 아이삭
솔직히 전개는 뻔했다. 원작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오스카 아이삭의 연기만큼은 매 장면 새로웠다. 결핍과 지능, 신념이 복합적으로 맞물려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이 상당히 입체적이었다. 모두의 반대에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연구를 소개하는 장면, 성공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 장면, 동생의 여자에게 다가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장면, 괴물이 탄생한 직후 혼란에 빠진 장면, 괴물을 죽이고자 하는 장면 등. 덕분에 모든 장면들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그 시대에만 존재했던 미치광이 박사를 이 시대로 데려왔다. 크리스토프 왈츠 역시 돈 많은 탐욕가를 아주 잘 구현해냈다. 그는 다른 작품에서도 여러 번 만나왔었기에, 나오자마자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빅터가 만들어 낸 생명체는 '괴물'이라고 불린다. '괴상하게 생긴 물체'라는 사전적 의미에는 부합할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들은 본인과 다르면 괴상하다고 정의하니까. 그런데 괴물이라는 단어는 괴상함뿐만 아니라 공포, 위기, 폭력 등 부정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 과연 이런 의미가 프랑켄슈타인에게 적용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존재조차 모른 채 태어나자마자 미움을 받았다. 그럼에도 성을 탈출하거나 창조주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을 돕고, 인간과 어울리고자 했다. 반면 그를 만들어 낸 빅터는 자신의 연구를 위해 모든 걸 쏟았지만, 결과물에 책임을 회피한다. 본인은 실패했을 뿐이라며, 생명을 파괴하려고까지 한다. 결국 그는 실패와 무책임으로 얼룩진 도망자 신세가 된다. 괴물은 빅터였다. 프랑켄슈타인의 겉모습은 분명 위협적이고 두려웠지만, 괴물이라는 본질은 내면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홀로 영원히 살아가야 하는 고달프고 외로운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창조주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한다. 바로 자신의 짝을 만들어 달라는 것. 그러나 빅터는 괴물을 또 만들 수는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리고 숨을 거두기 전 프랑켄슈타인에게 맹목적으로 생명체를 창조하고 방임했던 것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넨다. 그리고 앞으로는 스스로의 모습을 받아들인 채 살아가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죽기 직전에야 아들의 이름을 불렀고, 아들은 그 부름에 답한다. 그렇게 아들은 또 다른 지평선 끝으로 나아간다. 이들 부자는 빅터와 그의 아버지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빅터는 아버지에게 따뜻한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다. 오로지 가르침과 분노뿐이었다. 그래서 어려웠겠구나. 프랑켄슈타인을 아들로 인정하고 애정을 주기까지 참 오래도 걸렸다. 그런 애정을 받은 적도, 준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빅터가 자라면서 충분한 사랑을 받았더라면 결말은 꽤 많이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지평선 너머를 동경하며, 그곳을 향해 달려간다. 그런데 지구 내에서 지평선의 끝은 마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곳을 향해 달려간다. 지금보다 많은 것을 누리고 싶고, 어떤 제약도, 어떤 제한도 받고 싶지 않아서다. 그러나 영화는 인간에게 상실이 또 하나의 축복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유한한 삶을 살고, 언젠가 죽음을 맞는다. 끝이 있음에 오늘을 살아갈 수 있고, 끝이 있음에 감사히 살게 된다. 어쩌면 지상에서의 영생은 저주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으로 상실을 누릴 것인가, 프랑켄슈타인으로 영원한 삶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묻는다면 고민도 없이 상실을 마음껏 누리겠다.
<프랑켄슈타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