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놀이 간다, 우리게 부재했던 건 믿음이었다

영화 <꽃놀이 간다> 리뷰

by 그린

작품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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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죽었다

세상과 인간의 의미를 신에게서 찾지 않는 시대. 과학이 발달하고 이성 중심의 사고가 형성되며,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게 되었다. 니체는 신의 죽음을 현대인의 정신적 위기로 바라보며, 기존의 가치 체계가 사라졌기에 사람들은 방향을 잃고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새로운 인간이 탄생할 기회였다. 신의 힘이 아닌 자기 내면의 힘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절호의 기회. 신이 죽었으니 이제 우리는 초인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가치를 쫓고 있는가. 그리고 신은 정말 죽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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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자본주의 사회 속 처절한 인간 군상을 제시한다. 경제 활동을 할 자본은커녕 삶을 이어가기조차 힘들다. 돈이 없으면 맘대로 아플 수도 없는 현실이다. 신이 부재한 자리에 자본이 신처럼 군림하는 현실. 고통은 대물림되고, 유일하게 남은 건 살점을 모두 잃은 백골뿐이다. 그녀는 꽃놀이라는 아주 작은 꿈을 꾸었다. 무너진 삶의 의미를 되찾으려는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무너진 가치 속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존재, 초인이 되기 위한 인간적인 초월의 시도였다. 초인 개념의 미시적 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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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일을 한다. 왜?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

대답해 본 적 있는가.


돈은 가치가 될 수 없다. 금세 사라져 버릴 허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만이 유일한 가치라고 생각하고, 갈려가며 일한다. 신이 죽었고, 우리는 초인이 될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평생을 돈만 벌어대다 노인이 된다. 삶이 이토록 무상한데 벌어 무엇하겠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가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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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상황을 보면 신은 더더욱 없어 보인다. 아픈 엄마에게 성수를 뿌리고, 고해성사도 해본다. 달라지는 건 없다. 니체의 말처럼 신은 더 이상 인간의 세계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엄마가 완치되지는 못하더라도 치료는 받을 수 있게 해주세요.' '입원이라도 하게 해주세요.' '영양제라도 맞게 해주세요.' 그 어느 것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히 그녀가 병든 어머니를 위해 고해성사를 드리는 장면은 신의 부재와 인간의 무력함을 극명히 보여준다. 정말 신은 죽은 걸까.


신과 인간이 있다면 당연히 신이 더 우월하다. 그러니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인간은 오만하기 짝이 없어 신에게 바라는 것만 요구한다. 그리고 들어주지 않는다면 신이 죽었다고 단언한다. 한 번이라도 신이 우리게 원하는 바를 듣고자 한 적 있는가. 어쩌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원한 가치일지도 모르겠다. 신은 죽지 않았고, 우리는 오만하길 멈춰야 한다. 아무리 힘들고 절박해도 신의 뜻을 구해야 하겠다. 고통 속에서도 신은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하며, 우리게 부재했던 건 신이 아니라, 믿음이었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우리게 부재했던 건

신이 아니라, 믿음이었다

<꽃놀이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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