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터널 선샤인> <블루 발렌타인> <머티리얼리스트>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한참 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그건 진짜 어려웠으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고,
개념화할 수 없다는 것 하나만 확실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이다.
"모르니까 계속하는 거 아닐까?"
그렇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운명을 타고났다.
그 운명은 아주 밝고 행복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끔찍한 저주가 될 수도 있다.
여기 그 운명 한가운데 놓인 주인공들이 있다.
조엘은 여느 때처럼 일어나 출근한다. 그런데 오늘은 유난히 다른 곳으로 새고 싶다. 그는 충동적으로 몬톡 해변으로 향한다. 그리고 매력적인 여성 클레멘타인을 마주친다. 둘은 왠지 모르게 끌린다. 분명 처음 만났는데 너무 잘 맞는다. 조엘은 그녀의 집까지 데려다주고, 같이 술을 마신다.
이삿짐 회사에서 일하는 딘은 요양원에 있는 한 노인의 방을 정리하러 갔다가 신디를 처음 보게 된다. 왠지 모를 끌림을 느낀 딘은 신디에게 연락처를 남기고 떠난다. 그러나 신디에게 연락이 오지 않고, 둘은 우연히 버스에서 다시 마주친다. 딘은 혼자 앉아 있는 신디에게 말을 건다. 진심이 가득해 보이는 딘의 모습은 신디의 기억 속에 자리 잡는다.
뉴욕의 매칭 업체에서 일하는 루시는 어느 고객의 결혼식에서 해리를 만난다. 루시는 해리에게 고객이 될 것을 제안하지만, 해리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며 대화가 시작된다. 해리는 루시에게 호감을 드러내고, 루시 역시 그에게 매력을 느낀다.
딘과 신디는 데이트를 이어가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신디가 전 남자친구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둘의 관계는 예상치 못한 현실과 마주한다. 신디는 아이를 지우지 못하고, 딘은 그 옆을 묵묵히 지킨다. 오히려 그는 아이를 함께 키우겠다고, 결혼하자고 말하며 신디를 향한 사랑을 고백한다.
루시와 해리는 데이트를 거듭하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진다. 해리는 루시의 솔직함과 에너지에 매력을 느끼고, 루시는 해리의 압도적인 재력과 그 재력이 가져다주는 안정에 마음이 향한다. 그와 함께라면 삶이 훨씬 더 여유로워질 것이라는 계산도 끝났다. 둘은 함께 여행을 계획하며 더 깊은 관계를 맺는다.
둘의 설레는 첫 만남도 잠시, 오열하는 조엘의 모습이 이어진다. 과거 둘은 연인이었지만, 잦은 다툼으로 인해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보다 지치고 상처받는 순간이 더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조엘은 클레멘타인이 기억을 지우는 서비스를 통해 자신을 완전히 지워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충격과 분노 속에서 자신도 그녀를 지우기로 결심한다.
결혼 이후 딘은 변한다. 딸과 아이처럼 장난만 치며 시간을 보내고, 책임을 다하려는 어른스러운 모습은 사라진다. 따뜻하게 다가오던 그는 차갑고 둔탁해졌으며, 신디를 배려하는 마음도 흐릿해졌다. 술에 의지하며, 막무가내로 화를 내는 모습은 신디에게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된다. 딘과의 결혼은 사랑의 선택이었지만, 어느 순간 돌이키고 싶은 약속이 되어버렸음을 신디는 깨닫는다.
루시는 전 남자친구 존과 우연히 마주친다. 존은 여전히 루시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능력(재력)으로는 루시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만큼은 진심이고, 루시는 존과 함께 있을 때 살아 있음을 느낀다. 반면 해리와의 관계는 점점 공허해진다. 해리는 루시를 깊이 이해하거나 채워주지 못하고. 루시도 둘의 관계가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비즈니스였음을 깨닫는다.
조엘은 분노와 상실 속에서 클레멘타인을 기억에서 지우기로 결심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과 마주한다. 그녀의 표정, 목소리, 사소한 장난들까지. 그제야 조엘은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지, 함께했던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닫는다. 그는 기억 속에서 클레멘타인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렇게 클레멘타인은 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참아오던 신디의 분노는 폭발하고, 딘은 신디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감정적으로 대응한다. 격한 싸움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쌓였던 분노를 내뿜고, 그제야 딘은 가족을 생각해야 한다며 신디를 붙잡으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떠난 이후다.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확신이 신디의 표정에 선명히 드러나고, 딘은 등을 돌린 채 떠난다.
루시는 해리의 곁을 떠나 무작정 존에게 향한다. 존은 루시를 사랑하지만 두 사람이 다시 만나면 현실적인 문제로 과거와 똑같이 부딪힐 것이라며 루시를 밀어내려 한다. 하지만 루시는 이번에는 조건이 아니라 진짜 사랑을 택한다. 화려하지 않고 부족한 부분도 많지만, 자신을 진짜 사랑해 주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는 선택이다. 이에 존도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며, 많은 것을 해줄 수는 없지만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겠다고 약속한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여전히 어려운 질문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 딘과 신디, 루시와 존. 이들은 각자의 사랑에 충실했다.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던 때가 있었지만, 차갑게 식은 상태로 등을 돌리기도 했다. 때로는 아예 다른 사람과 사랑하기도 했다. 뭐 하나 교과서적인 정답이 없다.
"모르니까 계속하는 거 아닐까?" 그렇다. 사랑의 시작과 끝은 아무도 모른다. 너무나 본능적이기에. 프로이트의 '리비도'를 들어본 적 있는가. 이것은 성적인 욕구 그 이상이다. 인간이 살고 싶어 하는 힘이자, 쾌락을 향해 움직이는 에너지다. 프로이트는 인간 내면에 두 가지 큰 힘이 있다고 보았다. 살고 싶어 하는 힘, 사랑하고 묶고 유지하려는 힘인 에로스, 파괴하고, 깨뜨리고, 무로 돌아가려는 힘인 타나토스. 이 중에서 에로스의 에너지 총량이 바로 리비도다. 쉽게 말하면 내 안에서 누군가를 향해 계속해서 손을 뻗게 만드는 에너지라고 할 수 있겠다. 리비도는 옮겨 다니는 에너지다. 처음엔 자기 자신에게 향하고(자기애) 이후 부모, 연인, 친구, 일 같은 대상으로 계속해서 이동한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은 엄밀히 말하면 내 리비도를 저 사람에게 걸어둔다에 가깝다. 누군가에게 마음이 떠났다는 건 감정이 식어버린 게 아니라 리비도가 다른 대상으로 옮겨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엘이 클레멘타인을 지우는 과정은 리비도의 대상을 강제로 삭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삭제가 진행될수록 오히려 가장 강렬했던 순간들이 되살아난다. 결국 기억이 사라져도, 또다시 끌리고, 다시 만나게 되는 건 대상을 잃으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되돌아가는 리비도의 본질 때문이다. 우리의 이성은 리비도를 제어할 수 없다.
<블루 발렌타인>에서 리비도는 변하고, 옮겨간다. 딘과 신디의 뜨거운 애정은 리비도가 서로에게 강하게 작용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결혼과 육아라는 현실 속에서 딘의 리비도는 도피와 향락 쪽으로 이동한다. 반면 신디의 리비도는 안정, 존중, 균형과 같은 다른 욕망으로 이동한다. 그 결과 둘의 방향은 어긋나며 사랑은 차갑게 식는다.
<머티리얼리스트>에서 리비도는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루시가 해리에게 끌린 건 그의 재력 자체보다 재력이 주는 삶의 안정으로 리비도가 이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리와 함께 있을 때 루시는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했다. 즉, 리비도가 해리에게 오래 머물지 못한 것이다. 반면 존과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은 소박하지만 강렬하다. 그래서 루시는 조건과 계산을 떠나 리비도가 향하는 사람을 다시 선택한다. 사랑은 이성이 말하는 최적의 선택보다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하는 대상을 고르는 과정이다.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왜 하필 그 사람에게 꽂혔는가. 왜 아무 이유 없이 더 끌리는가. 왜 계속 생각나는가. 이건 리비도의 흐름 때문이다. 그래서 이유도 모르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사랑을 잘 모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의 리비도는 계속 누군가를 향해 손을 뻗는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랑한다. 어차피 설명하지 못할 거 본능이 향하는 곳으로 에너지를 쏟아보자. 본능에 충실해도 좋겠다.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너무 논리적이다. 차라리 '어디로 끌리는가'를 묻자. 결국 사랑은 '왜 그 사람인가'가 아니라 '누구에게 끌렸는가'에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