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콘티넨탈 '25>
한 노숙자가 퇴거 명령을 받고 자살했다.
임시로 지내던 보일러실에서
철사를 목에 감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당겼다.
건물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의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매일 일자리를 구하러 돌아다녔지만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일터를 찾지 못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하루 빌려 하루를 버티며 살았다.
그러니 내집마련은 물론이고,
보일러실이나 전전하는 삶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의 죽음은
문득 레이건 대통령의 한 일화를 떠올리게 했다.
커서 뭐가 되고 싶니?
미국 대통령이 될래요.
미국 대통령이 되면 제일 먼저 뭘 할래?
전국의 모든 홈리스들에게 먹을 것과 집을 줄 거예요.
정말 훌륭한 목표구나. 하지만 그걸 하기 위해 대통령이 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단다.
지금 당장 내 집에 와서 잔디를 깎고 잡초를 뽑고 정원을 청소하면 50불을 주마.
그러면 홈리스가 서성이는 식료품 가게로 가서
그가 음식과 집을 사는데 보탬이 되도록 그 50불을 주면 되잖니.
그 홈리스가 아저씨 집에 가서 일하고 아저씨에게 직접 50불을 받으면 안 되나요?
공화당에 온 걸 환영한다.
단편적으로 보면
'그들이 일을 하지 않는 게 문제다'라는 오해를 할 수 있다.
그러나 핵심은
'그들이 일을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속 노숙자가 죽은 이유는 노동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노동할 수 있는 구조가 없어서였다. 그는 일자리를 구하러 돌아다녔지만,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다. 미래를 고민하고 결정할 자본이 부족했으며, 자본을 마련할 구조는 부재했다. 복지 금액은 지속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자본은 언제나 노동의 결과론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게으른 사람을 벌주자는 말이 아니다. 일할 기회를 제공해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수가 말하는 자기책임론의 본질이다. 맹목적인 지원을 늘리는 게 아니라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람을 살리는 정책이다. 보수여도 좋고, 진보여도 좋다. 정부 주도의 일자리 창출이 진보적 방식이라면, 보수는 민간이 일자리를 만들 수 있도록 구조를 설계하는 데 집중한다.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사람을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진보가 모든 문제를 지원금으로만 해결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최근 정책 경향에서 '현금 지원 확대'가 중심 수단으로 부각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문제를 잠시 미루는 일일뿐, 그 뿌리를 고치지는 못한다. 침몰하는 배 안에서 구멍은 방치한 채 바닥에 고인 물만 퍼내는 것과 같다. 물을 퍼낼 게 아니라 배를 고쳐야 한다. 즉, 그들이 일할 수 있는 구조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를 이분법으로 나누고 싶지는 않다. 다만 방식의 본질을 보자는 것이다. 기회의 문이 열려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 영화 속 노숙자가 죽음을 맞은 이유는 그 문이 끝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해결책은 구조의 재설계뿐이다.
지원금의 총량은 중요하지 않다.
그건 소비되고 휘발될 뿐.
삶의 기반이 될 수 없다.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은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의 총량,
그 문이 활짝 열린 사회다.
미국 대통령이 되면 제일 먼저 뭘 할래?
전국의 모든 홈리스들에게
먹을 것과 집을 줄 거예요.
정말 훌륭한 목표구나.
하지만 기다릴 필요는 없단다.
지금 당장 내 집에 와서 일을 하면 50불을 주마.
그 돈을 홈리스에게 주면 되지 않겠니?
그 홈리스가 아저씨 집에 가서 일하고
아저씨에게 직접 50불을 받으면 안 되나요?
공화당에 온 걸 환영한다.
개인의 능력과 선택 너머에 놓인 대륙적 모순.
이제는 공유 자산이 되어버린 죄책감을 해부하다.
<콘티넨탈 '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