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차의 꿈>
자연을
하나의 거대한 생명으로
바라본 철학자가 있다.
그는 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을 하나의 육체로 이해했고,
육체가 어떻게 움직이며 스스로를 만들어가는지를 구분했다.
하나는 능산적 자연, 다른 하나는 소산적 자연.
능산적 자연은 '만드는 자연'이다.
누군가가 설계하거나 지시하지 않아도
스스로 작용하며 세계를 끊임없이 생성하는 힘을 말한다.
해가 뜨고 지는 것, 강이 흐르는 것, 나무가 자라나는 것뿐 아니라
인간이 시대를 만들어내고,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도
모두 이 근원적 힘의 표현이라고 스피노자는 보았다.
그는 이 힘을 신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신은 인간을 위해 무언가를 계획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필연성 때문에 끝없이 존재를 생산해 내는
본질적인 활동에 가깝다고 말했다.
능산적 자연은 모든 것이 시작되는 첫 호흡과 같은 것이다.
소산적 자연은 '만들어진 자연'이다.
산, 강, 계절, 사람, 관계, 기쁨, 상실...
우리가 만지고 지나가고 살아내는 모든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소산적 자연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늘 스스로를 주체라 믿지만,
그의 사유 안에서 우리는 더 큰 자연이 만들어낸 하나의 양태,
그 힘이 빚어놓은 결과물에 가깝다.
누군가의 탄생도, 어떤 시대의 비극도, 개인의 사랑과 상실도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연이 스스로 작용한 이후 남기는 필연의 모습일 뿐이다.
스피노자는 이 둘이 나뉘어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하나라고 말한다.
능산적 자연이 몸을 움직이면, 소산적 자연은 그림자처럼 드러난다.
우리는 그 그림자 위에서 태어나고, 사랑하고, 살아간다.
이 철학의 두 가지 층위를 그대로 환기하는 영화가 있다.
자연이 만드는 힘과 그 힘에 의해 흔들리는 한 인간의 삶을 고요히 비추는 영화.
<기차의 꿈>이다.
자연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계속해서 변화하고, 생성한다. 인간이 나무를 베고, 숲을 밀어내고, 철도를 깎아도 자연은 계속해서 또 다른 생성을 일으킨다. 숲은 다시 자라고, 땅은 새로운 길을 만들고, 강은 스스로의 방향을 조정한다. 능산적 자연이란 바로 이러한 힘이다. 어떤 목적도 없이, 그저 존재하기 때문에 세계를 낳는 근원적 활동이다. 인간이 자연을 관리하고 통제한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자연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신을 계속 만들어간다. 인간의 노동, 파괴, 건설조차 그 거대한 움직임 속에 포함된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는 분리할 수 없다. 능산적 자연은 인간의 계획을 넘어선 곳에서, 한참 전부터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로버트 그레이니어는 자연의 흐름 속에서 아주 작은 흔적처럼 놓여 있는 존재다. 그의 삶은 그가 놓인 자연적 조건들에 의해 형성된다. 그는 능산적 자연이 만들어낸 세계 안에서 일하고, 사랑하고, 가정을 꾸린다. 그리고 상실을 겪는다. 사랑도 상실도 그에게만 일어난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이 세계가 낳은 결과, 즉 소산적 자연의 양태일뿐이다. 그의 노동, 가난, 고독, 감당해야 했던 변화는 모두 더 큰 자연의 힘이 남긴 흔적들이다. 산업화의 파도는 그를 새로운 길로 밀어냈고, 계절은 삶의 속도를 결정했으며, 숲과 강, 불과 시간은 그가 머물 자리와 떠나야 할 순간을 알려주었다. 그는 스피노자가 말한 소산적 자연의 정확한 형상이다. 자연이 스스로 작용한 뒤 남긴 인간이라는 형식. 자연이라는 거대한 문장이 있다면, 로버트의 삶은 그 문장 속 작은 단어 하나와 같았다.
그는 자연의 산물이자, 자연의 증언이다. 마치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한 듯 보였지만, 실은 더 큰 흐름이 그를 어느 방향으로 흘려보낼지 미리 정해놓았다. 숲이 베어지면 일터를 잃고, 불이 지나가면 사랑을 잃는다. 로버트의 상실은 개인의 비극이라기보다 자연이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였다. 소산적 자연이 드러내는 하나의 흔적. 그리고 고독 역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고독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공통된 조건이며, 세계가 만들어낸 필연적인 여백이다. 결국 그의 삶 전체는 자연이 생성하고, 그 속에서 인간이 흔들리고, 그 흔들림이 다시 자연의 일부로 귀속되는 과정이었다. 그가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세계가 그를 만들어냈다.
영화는 변화하는 자연의 힘 속에서 흔들리는 한 인간의 삶을 따라간다,.
이는 자연의 힘이 모든 개체를 만든다는 스피노자의 사유와 깊게 호응한다.
그래서 <기차의 꿈>은 세계의 작용 원리를 비추는 매우 철학적인 영화다.
로버트의 노동과 사랑, 그리고 상실을 따라가다 보면
삶을 넘어선 근원적인 리듬, 세계가 움직이는 원리와 원칙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결말에서 로버트가 자연의 품으로 사라지는 모습은
개인의 삶이 거대한 순환 속에서 제자리로 돌아가는 순간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우리에게 오래된 질문을 다시 던진다.
우리는 왜 살고 있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기차의 꿈>은 질문에 대해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흙에서 빚어진 인간은,
결국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Natura naturata
<기차의 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