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 Hoyo (2019)
2019년에 스페인에서 만들어진 이 영화는 한 마디로 "문제작" 입니다. 보는 내내 받게되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좁은 공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주제는 "오징어 게임"과 흡사하지만, "오징어 게임"이 인간의 본성에 좀 더 비중을 두었다면, "더 플랫폼"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시스템에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징어 게임"이 456억원의 상금을 차지하는 마지막 1인이 되기 위하여 목숨걸고 싸운다면, "더 플랫폼"은 상금도 없고, 마지막 1인도 없으며, 오직 주어진 시스템에서 "죽느냐 사느냐" 그 자체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총 333층으로 수직으로 분리된 갖힌 공간에 처음보는 2명이 1달을 기거하게 되며, 물은 각 층마다 공급되지만, 음식은 맨 위층인 0층에서 출발하여 한 층 한 층씩 내려오면서 제한 시간안에 양껏 먹어야 하는 시스템 입니다. 이 뜻은 위쪽에 가까운 층은 제대로 된 음식을 먹겠지만, 아래로 내려올 수록 남이 먹다남은 음식을 먹어야 하며, 그것도 감지덕지이고 바닥쪽에 가까워 질수록 빈 그릇만 남아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텅빈 접시를 바라보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1달동안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결국 상대편을 잡아먹게 되는 "식인화"의 과정에 놓이게 됩니다.
각 층의 2명은 1달 동안 그 층에 기거하고, 다음달에는 다른 층으로 수면마취되어 옮겨지는데 어느 층으로 갈지는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운이 좋으면 위쪽으로 옮겨져 제대로 된 음식을 먹게되고, 운이 나쁘면 더 아래층으로 가게되어 같은 층의 동료가 "음식"으로 보이게 됩니다. 계층이 나뉘어지고 위에서 부터 아래로 갈수록 처절한 굶주림에 놓이게 되는 구조.
이것은 "자본주의" 입니다.
이 갖힌 공간은 감옥일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공간에 들어오는 사람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1종류와 가지고 들어갈 물건 1개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느날 주인공 "고렝"이 눈을 뜨고 자신이 "트리마가시"라는 노인과 같이 48층에 있는 것을 확인합니다. 처음보는 노인입니다. "고렝"은 입소할 때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를 들고 들어가는데 상대편 노인은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있습니다. 서로 통성명을 하고 있는데 위에서 음식테이블이 내려옵니다. 48층이므로 이미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노인은 미친듯이 달려들어 먹고, "고렝"은 차마 손도 못댑니다. 나중에 먹으려고 사과를 하나 들었더니 방의 온도가 변하면서 경고를 줍니다. 음식의 저장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음식을 다 먹고 음식테이블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데 그 위에 노인이 소변을 봅니다. 비정합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결국 "고렝"도 어쩔수 없이 먹어야 합니다. 1달이 지나고 둘은 171층으로 옮겨집니다. "고랭"이 깨어보니 노인이 칼을 들고 다가옵니다. 171층에 도달하는 음식테이블에는 이미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노인은 "고랭"의 살을 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살을 뜯기고 시간이 흐른 후, 노인이 다시 "고렝"을 먹으려고 하는데, 음식테이블 위에 정신이 나간것으로 보이는 여인이 올라타고 있다가 뛰어내려와서 "고렝"을 구해줍니다. 분노한 "고렝"은 그 자리에서 노인을 죽여버립니다. 이제 시간이 흘러 눈을 떠보니 33층 입니다. 노인이 죽었으므로 다른 파트너가 배정되는데 자신을 이 공간에 넣은 간수 여인 입니다. 이 여인은 전체 층수가 200층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심각한 암환자였고, 죽음을 앞두고 자신도 경험을 하고자 들어온 것입니다. 그녀는 음식을 잘만 나누면 아래층까지 충분히 전달될 것으로 생각하고 조금씩만 먹습니다. 그러나 아래층으로 내려간 음식테이블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결코 그녀의 생각과 같지 않습니다.
이제 둘은 202층에 배정이 되고, 여인은 자살을 한 상태입니다. 결국 그녀는 "고렝"의 음식이 됩니다. 시간이 흘러 이번에는 6층에 배정됩니다. 새 파트너는 흑인 "바하랏" 입니다. 그는 음식보다 가지고 있는 밧줄로 위로 올라갈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밧줄을 타고 오르다가 위층에서 대놓고 그의 얼굴에 변을 보면서 포기합니다. 여인과의 대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고렝"은 "바하랏"에게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 둘이 음식 테이블에 올라타고 무기를 손에 든 후에, 내려가면서 층마다 음식을 조금씩 배분하자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래층도 죽지 않을 만큼은 뭔가를 먹을 수 있고, 이런 사실을 이 감옥을 기획한 사람에게 알리자고 합니다. 즉, 우리는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리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산주의"입니다.
즉, 강력한 "자본주의"로 운영되는 이 감옥시스템에 "공산주의"를 도입해보자는 것입니다. 가능할까요? 둘은 6층에서 음식테이블에 올라타고 내려가면서 층마다 음식테이블에 달려드는 사람을 무기로 내려칩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둘에 의하여 음식도 공급받지만 동시에 희생도 됩니다. "고렝"은 정말로 200층 근처일 줄 알았지만, 음식테이블은 접시만 남은채로 "바닥"인 333층에 도달합니다. 다행히 "판나코타"라는 케익 비슷한 음식을 가까스로 하나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 바닥에서 꼬마 소녀를 마주하게 됩니다. 16살 이하는 받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역시 거짓이었습니다. "고렝"과 "바하랏"은 마지막 남은 음식인 "판나코타"를 소녀에게 줍니다. 다음날 "고렝"은 내려오면서 벌어진 끊임 없는 싸움으로 지쳐 사망한 "바하랏"을 보고, 소녀를 음식테이블에 태웁니다. 잠시후 음식테이블은 위쪽으로 쏜살같이 상승합니다. 333층 바닥에 남은 "고렝"에게는 남은 것이 "죽음" 뿐입니다. 그에게 살해당한 노인의 환영이 그의 눈에 들어옵니다. 둘이 어딘가로 걸어가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영화는 상층부와 하층부의 차이를 극명하게 표현합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죽어가는 사람이 많아지고, 바닥에 가까워 질수록 살아있는 사람이 거의 없으며, 중간층 이하부터 아래층으로 뛰어내려 자살하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이 영화보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화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Netflix에서 공급한 이 영화는 관객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흥행에 힘입어 "더 플랫폼 2"도 나왔으나 역시 1편을 능가하지는 못했습니다.
추가로 먹을 것이 없어지자 주인공 "고렝"이 자신이 가져온 "돈키호테"를 찢어먹는 장면이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지혜가 담긴 이 명저도 인간의 본능 앞에서는 그냥 "한 끼"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로 공평하게 나눠 먹자는 "공산주의" 아이디어는 철저히 본능게 기반한 "자본주의"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야 말로 인간의 본능에 가장 가까운 시스템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현재 지구의 어떠한 "공산주의 국가"도 원래의 "공산주의"이념을 유지하는 국가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