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는 광대하다.>
언젠가 지인과의 대화에서 그림(창작물)에 대한 완성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완성이라 규정할 수 있는 수준은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논변이 있었다.
이미 개인적으로 완성에 대한 인식과, 그것이 존재론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의 고민은 나름 정의해 둔 상태였지만, 하나의 고민과 명제 대하여 그것을 글로써 정리하는 행위에는 일종의 서랍장을 열어 머릿속에 산재된 생각의 파편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별도의 속성을 부여하는 것으로써 의미하는 바가 있고, 생각이라는 것은 휘발성이 있으므로 그것이 증발되기까지는 시간문제이므로, 그간 완성에 관한 내면적 고찰을 이번 기회를 빌어 정리해 두지 않으면 분명 망각의 길로 들어설 것이 자명하므로 여기에 적어둔다.
이것은 대단히 개인적 사견으로서, 한 개인이 완성이란 명제의 인식을 내적 사고의 단계적 전환과정을 나열하는 방식으로써 규명해 본다.
그림이나 글쓰기처럼 여러 창작적 활동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물음은 ‘과연 어디까지가 완성인가'라는 명제를 지나지 않을 수 없다.
미술을 전공으로 삼고, 한때 창작 활동을 했었던 나 자신도 이 명제의 속박으로부터 놓여날 수 없었는데..
처음 그림을 시작했던 무렵을 기억해 보면, 아마도 그 시절 정초했던 완성의 정의는 철저히 자아 외부에 준거를 두었던 것 같다.
아마 비슷한 느낌으로, 당시 완성에 대한 결론의 도출 과정을 지금 생각해보면 ‘전기 구조주의자들’의 방식에 다소 닮아있었지 않았나 싶다.
전기 구조주의자들은 존재의 인식을 집단 내, 개별자들의 상대적 체계에서부터 보았다.
예컨대 한 집단 속의 대상 'A'를 규정하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A와 다른 대상인 B나 C의 존재로부터 A를 구분하는 방식으로써, A는 B와 다름, A는 C와도 다름의 관계에서 얻어진 '상대성'의 근거를 통해 존재를 규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주의적 체계 안에서는 원하는 존재만을 도려내어 별도의 가치를 부여하고 지각하는 판단은 불가능하다.
구조주의 속에서 완성의 규정은 타 창작물과의 관계 속에서만 완성을 규정할 수 있었으며, 필연적으로 ‘수준론’이 등장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수준론은 그 특성상 타 창작물과의 양적/질적 비교를 피할 수 없고, 이는 곧 완성도나 작품 자체에 대한 폭력적 재단으로 치달을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
실제로 맞닿는 현실에서 수준론적 시각을 회피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서, 타인의 작품으로부터 받게되는 우월/열등감은 그 자체로 강렬한 감정을 지님으로서, 이로부터 유연하게 벗어나기 위해서는 고도의 심적 수행을 요구한다.
만일 지금도 내가 타자와의 경쟁 속에서 창작적 활동을 직업으로 삼고 있었다면,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살고 있었을 수도 있다.
언젠가 일신의 변화를 겪고 더 이상 창작활동이 직업이 아니게 되고 나서야, 완성에 대한 내면적 사고의 전환이 조금씩 일어났었던 것 같다.
직업의 변화에 따른 일상의 변동이 완성의 정의에 대한 인식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고, 더불어 여유로운 마음가짐으로 완성을 존재론적 시각에서 접근하기 시작한 후로부터 조금씩 사고가 전환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비단, 삶의 변화에 따른 인식의 전환이 '완성'이라는 협소한 주제에서만 한정되어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통시적으로 삶을 마주하는 방식과, '나'라는 존재에 대한 실존적 탐구가 미약하게나마 이루어지는 과정 중에 과거와는 어딘가 다른 생각의 개진으로 말미암아 완성에 대한 관점까지 변화가 동반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마치 많은 사람들이 사춘기를 기점으로 삶을 마주하는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 같은…?)
존재에 대한 변화된 인식의 관점으로 바라본 완성은 오히려 과거의 시각에서 바라보았을 때보다 더욱 규정하기 어려워졌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자'로서 자신의 작품이 '미완성'이라는 것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필시 선행적으로 궁극의 수준의 완성을 이미 알고 있어야만 그것을 준거로 완성과 미완성을 구별하고 인식하는 것일 텐데, 그렇다면 나는 궁극적인 완성은 어떻게 알고 있어야 하며, 그런 완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이 궁극적 완성이라는 것은 누가 정하는가?
같은 맥락으로 전기 구조주의자의 관점을 비판하며 변화된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있는 것처럼, 한 개별적 존재의 근본에 대한 사유는 생각들이 켜켜이 쌓여갈수록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전의 수준론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는 A작품이 B작품보다 좋아 보일 때, A작품을 더 상위의 완성도 규정했었는데, 인식의 변화과정을 거치며 들게 된 생각은 "그렇다면 공히 A작품이 더 나은 작품일지의 확고부동한 정의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고 내릴 수 있는 것일까?"
만일 확고한 정의가 존재한다면, 나와 다른 세대가 동일한 A작품을 볼 때도 결론이 일치한가? 그리고 다른 성별을 가졌거나, 다른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같은 결론에 다다르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진리값은 다수결로써 결정되거나, 어느 신적인 절대자가 존재하여 규정해 주는 것인가?
생각을 할수록 B작품의 품질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던, A작품마저도 더 우월할지 안할지의 근원 조차 알 수 없는데, 다른 무엇을 기반으로 규정을 할 수 있지?
모든 창작물을 제작하는 사람마다 내면의 사유가 틀리며, 결국 우리 모두는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모두가 동의할만한 작품의 완성도를 규정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
사실, 이런 물음에 대한 결론은 없을 것이다.
다만 당신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당위만이 의식 속에서 흐른다.
언젠가부터 특정 작품을 기준삼아 다른 작품의 완성도를 규정지을 수 없다는 사실 그 자체를 인정하게 됨으로써 창작물에 대한 완성은 오로지 창작자의 사적 영역으로 구분 지어졌다.
따라서 이 작품의 완성은 어디까지인가?라는 규정은 창작자 자신으로부터 발제하여, 당사자로 귀결되어야 할 물음이 되었는데…
여기에서부터 또 다른 물음이 파생된다.
작품의 완성에 대한 규정이 각자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매우 '사적인 영역'이라는 사유를 비로소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다시 한번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야 했다.
[내 그림에 대한 완성을 내가 정하는 것이라면, 근원적으로 도대체 그림이란 무엇이고, 나는 그림을 왜 그리고, 왜 완성해야 하는가?]
이 물음 없이는 스스로 완성을 규정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
우선, 그림이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사유의 시작은 내가 그림을 왜 시작하게 되었는지부터 거슬러 올라갔어야 했다.
대단히 다행히도 이 물음은 간단했다. ‘아름다운 인체를 그리는 것이 좋았다’
이 육신 어딘가의 기관으로부터 발생하는 아름다운 인체가 좋다는 이 느낌을 불특정의 어딘가로 표출하는 방식으로써 그림을 그리는 것.
다시말해서, 내 안에서부터 흘러넘치는 아름답다는 이 감각이 가없이 차올라 외부로 발산 되는 것.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가지 알 수 있는 점은, 이 감각은 일종의 방향성을 가졌다는 것.
내부로부터 외부로, 안에서 밖으로…
정의하자면 감각으로부터 발췌된 감정을 ‘대상화 또는 타자화’한다.라고 규정할 수 있었다.
즉 "내 안으로부터 꿈틀대는 이 미적 감정선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모두가 공유가능한 3차원의 시공간으로 옮기는 행위"야 말로 바로 그림 그린다는 것이고, 일종의 배설의 욕구와도 비슷하게 몸 밖으로 튕겨져 나온 감정(그림)은 더 이상 나의 일부가 아닌 외적 대상으로의 전환이다.
그런 점에서 그림은 감정이 대상화/실체화되어 내 앞에 놓인 것이고, 실체화 되어 내 눈 앞에 놓였다는 것은 타인과의 어떤 연결된 접점의 기능성을 담지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실체화된 그림은 1차적으로 창작자 자신의 내면의 일원적 관념이 '그리다'라는 행위로써 개념이 확장되어,이원적(다원적)이고 주체화 되어 객체와의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며, 나아가 그림이 본래의 창작자를 완전히 떠나 타인과 타인의 개별적 관계도 맺을 수 있게 된다.
또 한가지, 그리다는 행위에서 물성을 지닌 창작물이 발생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개념은 ‘가치’이며, 그림(창작물)은 그 자체의 희소성을 인정받아 '교환가치'로 승격되고 교환행위을 위한 ‘소통’이 발생한다. 물론 교환행위를 차치하더라도 물성을 지닌 창작물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의 의미와 규정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교환적 수단이 아니더라도 여전히 소통은 발생한다.
소통 역시 내부와 외부가 드나드는 통로이며, 어느 한쪽으로 닫혀있는 개념은 아닌 것이다.
여기까지 위의 물음들을 정리하여 답해 보면,
그림은 무엇이고, 왜 그리는가?
- 자기 내부에서 생성된 특별한 이미지가 체외에 '물화'된 것을 그림이라 하고, 내적 욕망이 이미지로 구체화 되어 배설적 욕구로서 재현하는 행위를 그림을 그리는 행위라 규정해본다.
그렇다면 완성은 왜 해야 하는가?
- 배설적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가 어떤 욕구가 발생했을 때, 그 욕구를 발산하는 행위에 있어 욕구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다면 굳이 그 행위를 멈출 필요가 없다. 따라서 완성은 욕구의 해갈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림)창작의 역사는 단지 욕구만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그림(창작물)은 물성을 지닌 대상물로서 사회적으로 물리적 존재를 규정하는 소통이 발생하고, 또한 희소성을 지닌 가치로서의 교환행위가 발달되면서 완성은 단순한 욕구의 해갈점을 넘어 교환를 위한 의무로서(소득으로서) 행위되기도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완성의 무엇이며, 그 한계적 규정은 어디까지인가? 이 물음은 현재진행형으로서 꾸준히 대답을 찾아가야 할 것이지만, 현재까지의 인식을 바탕으로 규정해보면..
위에서 규정한 그리다는 행위의 발생에 있어서 그림은 외부로의 발산적 욕구 즉, 외부로의 방향성을 지닌 것으로 보았다. 발신자가 창작자라면, 창작물을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수신자가 될 것이다. 또한 상당수의 수신자는 감각기관으로 받아들인 창작물을 어떤 방식으로든 또다시 외부로 발산하게 될 것이다.(언어라던지, 어떤 행위로든..) 이것을 소통이라 규정해불 수 있지 않을까?
그런차원에서 그림(창작물)은 외부로 향하는 배설적 욕구로 전환 되는 순간부터 소통의 속성을 갖게 되므로, 결국 타자와는 불가분한 근원으로서 동종 교배가 아닌 일종의 이종 교배적인 것이라고 정의해본다.
나는 주로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다. 때문에 하나의 그림을 충분히 그리고 나면 <저장> 버튼을 클릭하게 되고, 그 행위의 결과로써 화면 속 그림은 파일의 형태로 전환되어 저장/존재하게 된다.
자 이제부터 분기가 생긴다. 그림을 그대로 기계 속 파일의 형태로 둘지, 아니면 어떤 사이버 공간에 업로드할 것인지. (물론 프린트하여 오프라인도 전시도 가능하다;)
앞서 나는 그림을 ‘소통(이종 교배적)’의 한 방식으로 규정지었었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규정에 따른다면 완성의 최종 단계는 타인과의 '소통'의 단계로서 “공개된 공간”에 업로드(전시) 하는 것까지 완성의 범주로 넣지 않을 수 없다.
즉, 공개된 공간에 올릴지 말지가 완성과 미완성의 최종 분기로 남게 된 것이다.
이 글의 도입부에 언급한 지인과의 논쟁점도 이 지점이었다.
그림의 완성은 ‘마지막 붓터치’ 인가? 아니면 공개된 공간으로의 ‘전시’까지 인가?
지인께서는 "타인을 배제한, 오직 자신만 볼 수 있더라도 스스로 더 이상 그릴 부분이 없다면 완성이다."라는 주장이었고...,
나의 주장은 "그림의 속성은 ‘소통’이기 때문에 어딘가에 전시하는 것까지 완성의 과정에 포함되어야 하고, 전시되지 않는 작품은 개인의 ‘일기’에 가깝다." 였다.
사실 누가 맞고 틀리고의 답은 없는 게 맞을 것이다.
다만, 논쟁하던 당시에는 언급하진 않았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 생각한 것은 있었다.
<디지털로 그린 그림은 파일의 형태로 저장되므로, 완전한 복제의 속성을 추가로 가진다.
그렇다면 개인의 PC 속 폴더에 파일로 저장된 그림과, 공개된 공간에 업로드된 그림은 어떻게 다른가?>
디지털 복제된 동일한 두 점의 그림 중, 공개된 공간에 전시된 그림(1)과, 개인 폴더에 보관된 그림(2)는 어떻게 다른가?
나의 결론으로는, 이 둘은 완전히 같지 않고, 엄연히 다르다는 생각이다.
(1) 번 그림은 속성적으로 ‘보여짐’의 DNA를 가지게 된다.
(2) 번 그림은 속성적으로 ‘보관’의 DNA를 가지게 된다.
내가 주장했던 바인 그림은 ‘소통’의 속성을 가지는 것이므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보여짐’의 DNA를 가져야만 최종적인 완성이 될 수 있다는 공식이 성립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저 개인적 ‘보관’에서 작품이 마무리된다면, 그것은 그림의 근원적(배설적) 속성인 '소통'이 결여된 진정한 의미의 완성으로 볼 수 없다는 결론이 성립된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논변에서 어떤 것이 옳고 그름은 없다.)
다시 생각을 이어나가서.. 즉, ‘시뮬라크르’의 시대에서의 완성은 무엇일까?
예컨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미국의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의 작품은 어째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완성을 포괄한 인정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가 작품으로서 인쇄한 수많은 복제 인쇄본 중 전시된 인쇄본과, 전시되지 않은 인쇄본은 어떤 차이를 가지는가?
그가 프린터로 출력한 2장의 동일한 인쇄본 중, 그가 결국 전시하지 않은 나머지 1장의 인쇄본이더라도 전시된 작품과 질적인 차이는 없으니 그것 또한 완성된 작품이라 규정할 수 있는가?
어렵게 돌아왔지만, 내면적으로 이러한 물음들까지 거치고 나서, 지금의 내가 내린 완성의 결론은...
<완성의 최종 단계는 공개된 공간에 전시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경위다.
동일한 두 복제본 중 타인에게 보인 작품은, 보여지지 않은 작품이 가질 수 없는 무게, 즉 ‘중압감’라는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말하자면 습작과 전시작의 차이)
이것은 오직 타인에게 보여지는 방법만으로 획득할 수 있는 진귀한 속성일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작품에 ‘영혼을 부여하는 과정’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보여짐’이라는 행위는, 동시에 ‘남겨짐’의 파생적 속성을 갖게 된다.
타인의 기억에 남겨짐, 역사의 기록에 남겨짐…
물론 그 누구에게도 보여지지 않은 채로 고이 보관된 숨겨진 작품이 어느 날 후세에 발견되어 창작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역사에 남게 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과정에서 조차 뒤늦게 타인에게 ‘보여짐’을 포괄한다.
일단 생각은 여기까지다.
‘전시된 공간은 어디여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아직 남아있긴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전적이라 볼 수 있는 이 물음은 현대사회에서 점점 그 중요함을 잃어가고 있다.
과거에는 장소의 권위, 그리고 인구의 유동이 잦은 광장에서의 전시가 가장 효율성 있고 현명한 선택이었겠지만,
작금의 시대에는 다원주의의 바람을 맞아 권위는 조금씩 풍화되고, 사람들이 가장 많은 광장은 광활한 네트워크 속의 어디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문득 '쿠사나기 소령'이 말한 대사가 생각난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이 광대한 '네트' 어디가 됐든 공개적으로 업로드한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완성의 최종 단계라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이 [전시]라는 행위가 숭고해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