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소한 시각에서의 세계>
매우 사적인 세계정신, 세계주의
사람들에게 실재의 세계가 어디에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면, 대개 물리적으로 구성된 공간으로서 자신이 점유하고 서 있는, 바로 여기 <물리적 공간>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물리적 공간의 비변화적이고 고정적 체계라 할지라도, 결국 개별자들의 해석과정에서 상이 흐려지고 체계는 분산된다. 사람들은 동일한 하나의 사물의 가치에 대해서도 저마다 다른 가중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개별자마다 다른 세계(체계)를 가졌다고 볼 수도 있다. 결국 실재의 세계 <물리적 공간>도 무한에 가까운 유니버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많은 철학자들이 세계정신에 대해 말해왔지만, 글쎄.. 나는 아직 철학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지 않아서 철학자들의 말을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순전히 개인적으로 사유하고 있는 ‘세계정신, 세계주의’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세계’라는 단어를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구분하여 사용한다.
지리적 범주, 일정한 체계의 범위, 또는 인류나 우주의 총체..
여러 쓰임이 있지만 적절한 수준에서 정의해 보면, 세계라는 것은 하나의 ‘제한된 체계’가 아닐까?
실재의 물리적 세계부터, 관념의 세계까지..
나의 세계정신이란 이 모든 제안되고 공인된 세계관의 속의 지표에 자신의 좌표를 찍는 것, 즉 많은 세계관에 각각 자신만의 관점을 갖고 바라보려는 시도가 나의 세계정신이다.
세상에는 무한에 가까운 수만큼 존재하는 세계관이 있다.
이 가능한 많은 세계에 관점을 가져 보는 방식으로써 유물론적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 관념론적 관점, 어떤 음악가의 음악 속에서 가져보는 관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불교의 윤회, 성경적 교리와 내세관,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들여다보는 관점, 영화나 드라마, 책 속에서 제안하는 세계의 관점…
제안된 사건, 특정한 체계 속, 가능한 많은 세계관에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가져보는 것은, 그 모든 세계 속 좌표에 자신이 존재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하나의 관점을 가진다는 것은 그에 대응되는 지식을 가진다는 것일 게다.
살아가며 어느 날 길을 잃었을 때, 현명한 선택이 필요한 순간에 각 세계관의 펼쳐 둔 관점들로부터 파생되는 생각과 지식들이 어떤 임계점 이를 때 나의 뇌로 작용되어 새로운 세계관의 확장을 가져다 줄 지도 모를 일이며, 각 세계관의 좌표를 점유한 그 모든 내가, 언젠가 도탄에 빠져있을 어떤 나를, 구원해 줄지도 모를 일이다.
많은 세계관에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적 근거를 찾는 게 아닐까. 우리는 자신의 존재성을 어떻게 근거할 수 있을까.
‘나’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으며, '나'는 무엇이고, 나를 나라고 생각하는 있는 이 ‘의식’은 무엇일까?
‘이기적 유전자’ 설에 의하면 유전자나 세포는 개별의 결정력과 운동성을 가진다. 나의 몸을 구성하는 유전자와 세포가 나의 의식과 합일되지 않는 개별성을 가졌고, 우리의 세포 속에서 평생을 함께 살면서 생멸을 같이하는 미토콘드리아도 자신의 숙주와 독립된 생명체로서 독자적 유전자를 가졌다. 이렇게 모자이크처럼 개별적 존재의 총체로 이루어진 이 신체에서 어떻게 하나의 의식이 떠올랐는지 정말 알 수 없고 경이로운 일이다.
언젠가 ‘의식’이라는 것은 ‘맥주의 거품’이라는 말을 들을 적이 있다. 맥주를 잔에 따랐을 때 차오르는 거품처럼, 우리의 생체가 구성되고 나서 차오르는 것이 의식이라고…
이렇게 신비로운 과정 속에 우연적으로 발생되는 의식으로부터 나를 ‘나’라고 느끼는 자의식이 발현된다. 이러한 우연을 기반으로, 우연하게 느껴지는 이 나를, 어떻게 근거할 수 있을까?
혹자는 대체 그런 걸 아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한다. 이럴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반문하고 싶어 진다.
'나'라는 자의식의 기원과 존재적 기반이 '과학적'으로도 명확하지 않고, 당신 역시 스스로 자의식의 존재 여부의 탐구적 판단의 필요성 조차 당신의 정체성으로부터 나온 질문일 텐데.. 그것의 근거를 찾는 활동이 필요한 것일지 아닐지를 어떻게 규정하지?
어쩌면 자기 자신에 대한 근거를 찾는 이유는 간단한 것일 수도 있겠다.
결국 하나의 기준을 삼고자 하는 염원 같은 것이 아닐까?
살면서 느낀 바, ‘나’라는 온전하고 항존적인 기준을 근거로 외부를 식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듯하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의 주변에는 이미 세상의 모든 것들이 존재하고 있고, 존재성으로부터 발현되는 가치는 매 순간 우리를 현혹한다. 가치의 관성에 떠밀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쉽게 선동에 판단을 내맡기며, 기준 없는 유행에 매몰되어 포르말린에 담긴 줄도 모른 채, 스스로 대상화를 자처한 그런 자신을 과시하며,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타인에게 이관한다.
때로는 상식과 전통마저 우리의 생각과 눈을 가리고, 신성이 부재된 신상만을 숭배하는 종교처럼, 근본을 잃은 빈 껍질이 형태를 유지하는 시뮬라크르의 세계 속에 자의식만이 길을 잃고 허무하게 놓여 난다.
대상의 근원은 우리의 직관과 다를 수 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를 찾기 위해 근원을 파헤쳤고, 그가 발굴한 도덕의 근원은 '원한(怨恨)'이었다.
종종 우리는 이전 세대로부터 계승된 관점과 가치를 정화 과정 없이 받아들인다. '전통과 상식'이 그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어 보이는데, 이것은 마치 블랙홀처럼 집단의 사고를 장악하는 중력장이 매우 강력하여, 많은 가치를 자신의 시스템 속으로 흡입한다.
시스템은 대체로 폭력성을 수반하며, 개인의 자유의지를 저지하고 지성을 소거하여 사고를 지배한다.
예컨대 국가 간의 원한 관계에 대해서도 개인이 느끼고 나서 판단해야 할 ‘원한'의 발생적 근거를 탐구할 겨를 없이, 과거에서부터 원한의 국가였다.라는 '전통성'에 빙의되어 타 국가를 증오하도록 만들며, 감정과 사고를 소거시키고 그들의 재난을 비웃는다. 이것뿐인가? 젠더적 차별은 성장기부터 빌트인 되어 있거나, 인종의 피부색과 국가의 GDP를 구별하고, '상식'의 이름으로 자신보다 높은 직함과 자본을 숭상한다.
우리의 물리적인 눈은 분명 떠 있지만, 눈앞에 보인 실재의 세계는 단지 하나의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 너머의 세계, 즉 관념의 세계들은 더 많은 세상을 담지하고 있다. 그 뒤편의 세계에도 시선을 분배하는 수고스러움은 분명, 가치들이 서로 뒤엉켜 왜곡된 아나모르포즈적인 이 세계에서도 자신을 온전히 알아가는 동시에,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삶에 대한 애도가 될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 삶을 애도할 줄 아는 자가, 타인과 세계도 위로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를 안다는 행위의 정초는 관점의 다양성에서, 즉 많은 세계에 대한 열망과 방사적으로 열린 시각으로 탐구하고 관점을 가져보는 것.
물리적 공간에서의 나의 좌표와, 동시에 관념적 공간에서 나의 위치를 온전히 찾아보는 것
이것이 나의 ‘세계정신’이라 발음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