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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득으로서의 상실 [그림]

< 잃음으로써 그려지는 그림>

by 춘고

1.


내가 아는 삶은 마치 퍼즐 조각처럼 하나둘씩 채워감으로써 완성에 다가간다.

하지만, 반대로 '상실로써 완성되는 삶'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그것은 애초에 가졌던 것을 잃음으로써 비로소 완성에 가까워지는 삶.


태어나 빛을 본 순간에 비로소 어미의 '태'를 잃는 것으로 생의 시작이 매겨지듯이,

필연적 상실로써 시작되어 완성에 다가가는 그런 삶.


2.

어쩌면 우리는 무기력하게 유년기와 소년기를 시간 속에 상실하고 나서야 비로소 성인이 되었을까?

마치 로켓이 고도를 가르며 오를수록 추진체를 상실하며 추력을 얻듯이..

시간의 이름으로 획득한 삶을 촛불처럼 연소하며 상실을 근거하여 앞으로 나아간다.


3.

내가 아는 상실의 영화 <중경삼림>과, <러브레터>

모두 90년대 개봉했으며, 두 영화 모두 상실로부터 시작된다.


이 영화들에서 상실은 '끝으로부터의 시작'을 그려낸다,

상실로부터 하나의 관계가 소멸되었고, 곧 새로운 만남(사건)이 시작된다.

상실은 어쩌면 '잃음의 획득' 즉, '잃음'의 해석이 아닌 '획득'의 다른 번역으로서 완성을 이루는 마지막 조각이 되고, 어쩌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상실한 그 순간은' 끝과 시작' 그 사이의 무중력에 놓였다고 볼 수 있겠다.


나에게 '러브레터'라는 영화는 조금 특별하다.

아마 지금으로부터 22년도 넘은? 세기말의 기운이 사회를 뒤덮던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연히 친구를 통해 러브레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처음 볼 때부터 영화가 주는 겨울의 분위기와 음악, 어떤 간절함이 나의 감성 어딘가를 자극했고, 그 이후로 몇 년이 지나는 동안 서른 번도 넘게 봤던... 나에게는 그런 영화였다.

최근 어느 날, 문득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찾아보게 되었는데, 현재의 관점에서 다시 보니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야와 그것으로부터 또 다른 해석을 해나가는 나의 달라진 관점으로부터 나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벌써 20년 전... 어릴 때 그렸던 '러브레터'


<중경삼림>은 상실로부터 발생되는 독백의 영화다.

두 남성은 현실에 다가온 상실을 근거 없는 언어로 발음함으로써 내면을 비우고, 그 속에 허공을 버린다.

상실은 그렇게 두 남성에게 머물렀던 하나의 사건을 갈무리 함과 동시에 새로운 인연에 대한 어떤 암시를 나타내기도 하며, '끝과 시작' 그 중간 어딘가에 존재하는 무중력의 준위일지도 모른다.

하나의 완결적 속성을 지닌 '끝과 시작'은 상실의 파생적 단계로서.. 우리는 얻음으로써 잃거나, 잃음에서부터 얻기도 한다.

뒤늦게서야 중경삼림을 보고는 그 감명을 이어받아 그렸던 '양조위'


영화의 필름은 상실되지 않기 위함이지만, 우리는 삶이라는 지속적인 상실로부터 필름을 이해한다.

오늘 나의 하루 역시 어떤 측면에서는 상실일 것이며, 상실로써 하루를 채운다.


그렇게 영화와 삶은 반비례의 궤적으로 정비례에 다가간다.

눈꽃의 향기를 애써 맡을 필요가 것처럼, 자연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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