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자기표현의 정직한 양식이다.>
[인간은 쓸쓸할 때가.. 제일 제정신 같아]
[그래서, 밤이 더 제정신 같아]
[어려서 교회 다닐 때, 기도 제목 적어 내는 게 있었는데]
[애들이 쓴 거 보고, '이런 걸 왜 기도하지?']
[성적, 원하는 학교, 교우관계]
[고작 이런 걸 기도한다고?]
[신한테?]
[신인데?]
[난... 궁금한 건 하나밖에 없었어]
[나... 뭐예요?]
[나 여기 왜 있어요?]
[91년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50년 후면 존재하지 않을 건데]
[이전에도 존재했고, 이후에도 존재할 것 같은 느낌..]
[내가 영원할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에 시달리면서도, 마음이 어느 한 군데도. 한 번도.. 안착한 적이 없어]
[이불속에서도 불안하고, 사람들 속에서도 불안하고...]
[난.. 왜, 딴 애들처럼 편안하게 웃지 못할까...]
[난 왜.. 늘 슬플까?], [왜, 늘.. 가슴이 뛸까?], [왜, 다.. 재미없을까..]
[인간은 다 허수아비 같아]
[자기가 진짜 뭔지 모르면서, 그냥 연기하고 사는 허수아비]
[어떻게 보면 건강하게 잘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모든 질문을 잠재워 두기로 합의한 사람들일 수도..]
['인생은 이런 거야..'라고 어떤 거짓말에 합의한 사람들]
[난 합의 안 해]
[죽어서 가는 천국 따위 필요 없어]
[살아서 천국을 볼 거야]
하나의 개인은 하나의 존재로서 하나의 서사를 가졌고, 여전히 오늘도 하나의 삶은 실천 중이다.
하지만 참으로 장구한 자신의 서사인데, 그 시작은 어디부터일까?
'나'라는 의미는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흘러가다 보니 삶이었다.
죽어가는 신으로부터 종교는 탄생되었고, 스러져가는 사회로부터 사회주의가 솟아났다.
조용하게 지쳐가는 것에서도, 조금씩 퇴색되어 가는 것으로부터도 의미는 형상화된다.
언젠가 의미는 찾는 것이 아니라, 찾아지는 것이라고..
샬레에 담긴 따뜻한 말 속에서 피어나는 곰팡이처럼
조금씩 알게 모르게, 의미는 침식된다.
하지만, '나'라는 의미는 그렇게 찾아지지 않더라.
정신이 들고나니 삶으로부터 의미를 찾고 있었지만,
찾아지고 나면 그것이 무엇에 관한 의미인지를 알 수 있을까?
'불안'은 자신을 표현하는 다른 번역이지만, 자신은 언어로써 번역되지 않는다.
'나'를 가장 정확하게 발음하는 것은 과연 모국어일까?
어쩌면 지구 반대편 알지 못하는 외국인이 '나'를 가장 정확하게 발음할 수도 있지 않을까?
종종 타인으로부터 ' 어떻게 먹고살지, 내가 남보다 나은지...'의 질문 이외에 다른 질문을 던지면,
실용적인 질문이 아니라거나 소모적인 질문이라는 취급을 받을 때도 있으며, 다른 위상에 존재하는 사람인 것처럼 눈길을 주고는 한다.
사실 스스로도 알고 있다. 존재의 근본을 묻는 질문에는 답을 낼 수도 없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질문을 던져야 했다.
언젠가 문득 깨달은 적이 있다.
존재를 질문한다는 것은 어쩌면 답을 찾는 의미로써가 아닌, 지속적인 질문을 던지는 의미라는 것.
그것만으로도 생각은 제련되고 질문의 순도는 올라가며 내가 더 나아질 수도 있다는 것을..
여하간 '나'를 나라고 규정하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하는 '불안'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근원을 알 수 없는 채, 삶 속으로 내던져진 것에서부터 일 게다.
그러므로 삶은 왜 실천되고 있는가의 물음이 아닌, 왜 시작되었는가.. 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