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오늘, 여기 살았다는 것, 그것도 당신과 함께..>
<개인적인 부모로부터의 해방>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엄마'를 '엄마'라고 인식하지 않게 되었을 때가..
돌이켜보면 꽤나 어렸을 적 부모의 이혼 이후,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던 어린 나는 어머니에 대한 집착이 꽤나 있는 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엄마의 귀가가 늦는 날이면 언제나 아파트 5층이던 우리 집 베란다의 세탁기 위에 올라앉아서 하염없이 창 밖을 바라보며 이제나저제나 엄마의 모습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평범한 시간이 흘러 어느덧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엄마는 중학생 때부터 매일 방구석에서 '세일러문/웨딩피치' 따위를 그리고 있는 당시의 나를 바라보며 문득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나를 데리고 미술학원을 찾아갔었다.
그 후 미술학원을 다니게 되면서 나의 삶은 마치 다른 유니버스에 떨어진 것처럼, 학원을 다니기 전/후로 날카롭게 나뉘었고, 새로운 친구들과 더불어 내 앞에 전제된 모든 것들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인식으로서 삶을 마주하게 되었다.
언제나 내성적으로 평가받던 나의 성격의 변화와 동시에 말 수도 늘어났다.
아마도 추측컨대 그때였던 것 같다 , 나의 '해방'의 시작은,
온전히 내가 나로서 사고하고, 나만의 확고한 무언가 생기고, 스스로가 특별하다고 여길 수 있게 된...
그 뒤로 언젠가부터 '엄마'를 더 친근하게 부르는 방식으로써 '아줌마', 또는 ' 00 씨'라는 호칭을 종종 사용하게 되었는데, 예를 들면 "어이고~ 우리 아줌마/00 씨 오늘 늦으셨네~?"라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도 더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느껴졌달까?
물론 그러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더라도, 처음 그런 호칭을 사용했을 땐 어떤 죄책감 비슷한 느낌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게도 '엄마'보다 '아주머니, 00 씨' 쪽이 더 친근하게 들리는 느낌이었는데.., 많은 세월이 흐른 최근 들어 생각해보니 부모를 성함이나, 사회적 호칭으로서 칭한다는 것은 단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넘어서서 나도 모르는 사이, 부모를 삶의 동반자로서 인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단지 '어머니'가 나를 낳고 길러준 지배적이고 혈연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사회 속에서 운 좋게 만난 한 명의 특별한 타인으로서 인식되고 나니, 그녀의 다른 면들이 보이게 되었던 것 같다.
부모적 인식을 넘어선 시야로 관찰된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 옳은 결정을 하는 인물이 아니었고, 사회 속에서 흔하게 상처받거나 서툴기도 하고, 때로는 여러 감정이 누적되어 나와 누나에게 어떤 화풀이도 하는 등...
인간으로서 한계가 명확한 그저 평범한 여성이었다.
내 인생의 동반자로서의 그녀는 언젠가부터 힘든 순간엔 서로 돌봐야 하고, 모르는 것이 생겼을 땐 서로 조언하거나, 가끔은 무리한 선택의 기로에서 서로의 선택을 존중하고 옆에서 지켜봐 주는 그런 관계로 바뀌었고, 이제는 나이가 상당히 들어버린 그녀를 단지 어떤 가족 그 이상의 연민으로서 여전히 여전히 좋아한다.
아마도 이 경험은 부모라는 거대한 타인으부터의 해방이 아닐까?
<나의 해방일지가 말하는 이야기>
근대를 지나며 인간은 신으로부터 해방되었고, 그 해방된 공간 속에 인간의 규율이 들어섰다.
과거에는 신이 나의 탄생과 존재의 가치를 인정해주었지만, 근대 이후 인간은 스스로 존재의 가치를 발견해야 했고, 아마도 그 대응의 방법론으로 극한의 이성적 사고가 신을 대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후의 현대에도 여전히 인간은 이성이 만들어 낸 로고스적 사회의 정치/문화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어 보인다.
인간의 규율적 세상 속에서 나고자란 개인들의 자아는 결코 타인을 배제할 수 없으며, 언제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행동 양식을 규정해야 했고, 기성 타인들의 행동을 습득하거나, 자신보다 조금 더 현명해 보이는 타인들로부터 자신이 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받게 되었을 것이고, 때로는 아무 대책 없이 타인만을 쫓다 결국 자신의 존재 근거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본질 없이 오로지 은유하는 존재가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과연 타인을 배제한 온전한 자아의 존립이 가능할 수 있을까?
비극적이게도 인간은 홀로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아무리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며 떠나가도, 타인은 끝은 다른 타인으로 환유되며, 한 명의 타인으로부터 해방의 출구는 또 다른 타인의 입구다.
그런 점에서 <나의 해방일지> 이 드라마 속의 인물들은 이러한 굴레 속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 '어떻게 이런 세상에서 자신의 좌표를 찾아낼 수 있을까'에 대한 자아 표류와 성찰의 이야기로 느껴졌다.
<'염기정'의 해방>
[받는 여자]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참수됨을 차마 볼 수 없겠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의 머리를 비로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마치 귀중한 예술품이 교환할 수 없는 가치를 가졌음으로 인하여 - 교환되어야 하는 것처럼...
기정(이엘 분)은 자신만의 구분 가능한 고유한 가치를 볼 줄 아는 인물임으로 - 아무나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1화 첫 장면, 기정은 곧 사랑으로 만나게 될 운명의 남성 태훈(이기후 분)이 옆자리에 앉아있는 줄도 모르는 채 '애 딸린 유부남'이라 통칭하며 그들 부류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지만, 막상 '애 딸린 유부남'인 태훈을 알게 되고, 그가 자신 앞으로 다가왔을 때, 기정에게 있어 그(태훈)의 가치는 그 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의 공장에서 무한하게 찍어내는 동일한 상품들 중에서도 '내 것'은 그 무엇과도 다른 교환 불가적 가치를 지니게 된 것처럼..
마찬가지로 기정이 말한 '아무나 사랑할 거야'의 '아무나'는 모든 것이 포화됨으로써 모든 것이 무가치해져 버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그 무언가를 발견하고자 하는 자아실현의 의지인 셈이다.
결국 기정은 자신만의 특별한 사람 태훈을 찾아냈고, 비록 태훈은 극 초반에 기정이 무시했던 뻔~한 '애 딸린 유부남'이지만, 이제는 자신만의 '특별한 애 딸린 유부남'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흔함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무언가를 찾는 것, 진정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는 행위는 타인이라는 동어반복적 굴레 속으로부터 자신의 온전한 좌표를 찾아가는 과정이고, 그것은 충분히 해방으로 향하는 길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염창희'의 해방>
자신의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것들이, 반대로 견딜 수 없게 한다.
그것은 어떤 권위이거나, 금전이거나, 아니면 사람이거나..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을 존립하는 근거가 바로 그것이라고, 그것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고들 말하지만..
이른바 '치명'은 거기에 내재되어 있다.
사람들은 성공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지만, 성공할 수 없기 때문에 좌절한다.
그런 점에서 성공은 좌절의 다른 발음이 될 수 있으며, 성공과 좌절은 불가분 하다.
'창희'(이민기 분)는 타인들처럼 성공하기 위해서 일하고,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견디고, 평범해지기 위해서 연애하고, 보여지기 위해서 차(車)를 갈망한다.
그렇게 창희는 남들보다 조금 더 나아지려는 평범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자기 안의 어떤 이질(異質)을 발견하게 되는데, 남들처럼 욕망을 하면 할수록 그 욕망하는 자신의 모습, 즉 욕망을 뒤쫓아 달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 그 자체를 포착하게 되면서 타인과 분리된 '존재'로서의 자신을 조금씩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자신 속에 내재된 이질감이 '구 씨'의 차를 빌려 타는 과정에 비로소 외부로 터져 나왔고, 결국 창희는 자신에게 '차'가 필요했던 것이 아닌, 남들에게 그럴싸하게 보이려고 했던 것이 아닌, 좋은 차로 연인을 태워야 했음이 아닌...
하나의 온전한 자신만의 공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방향성이 진정 자신에게 필요했음을 깨닫는다.
결국 창희는 타인들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선다.
그러던 중 죽음이라는 것을 목도하고, 타인의 죽음으로부터 자신만의 해방을 향한 길을 발견한다.
어떤 자에게는 죽음 그 자체가 '해방'일 수도 있겠으나, 다른 누군가에게는 타인을 온전한 죽음으로 영도하는 것
즉, '길을 걷는 자'만이 아닌, '길을 안내하는 자'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음을...
자신의 운명이 그런 것임을 받아들이고, 사회가 요구하는 욕망을 내려놓음으로써 '해방'이 될 수도 있음을...
<'염미정'의 해방>
증오하는 자에게 욕을 퍼부어도, 누군가에게 속내를 털어놓아도, 무거운 머리카락을 댕강 잘라보아도 결코 자신의 무게는 줄지 않는다. 그것들은 결국 은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미정'(김지원 분)은 욕망을 갖지 않는다. 결코 욕망으로 자신이 대변될 수 없음을 알고, 무엇을 해도 결국 잉여로서 자신이라는 존재는 여전히 남아 헛돌기 때문이다.
그 무엇을 버린다 해도 결국 자신은 남는다. 그것은 자신이 '실존'하기 때문이고, 자신이라는 존재는 더 이상 불가분적 최소의 단계로서 더 이상 나눌 수도.. 폐기될 수도 없다. 그러한 사실이 미정은 슬프다.
대책 없이 놓여 난 자아를 자각해버린 미정에게는 모든 것이 무익하고 시시하다. 욕망을 쫓는 사람들, 그 욕망을 쫓는 사람들을 쫓는 사람들..
미정의 눈에 비치는 타인들의 눈빛은 자아를 잃어 동공은 풀려있고, 맹인의 시야로 타인을 재단한다. 그중에서도 미정이 제일 참을 수 없는 건.. 그런 타인들이 물리력을 지니고 자신을 가해하기 때문이다.
미정은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야 했고, 사회로 내던짐 당해야 했으며, 불가항력적으로 타인을 마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한없이 비극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미정이 타인과의 감정적 소통 없는 순수한.. 또는 공허한 '추앙'을 바란 건 어쩌면 당연하고 간절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필연적으로 미정의 시야에는 공허한 남자 '구 씨'가 발견되었을 것이고, 그 둘의 무욕적이고 공허한 연애는 '충만한 공허함'으로서 오히려 어떤 북돋음을 받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무엇인가 비어있다는 것은 비어있음이 가득 찬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삶으로부터 채워나가기 위해 살아가지만, 상실로써 채워진 삶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자신을 온전하고 차분하게 비워감으로써 자신의 내부를 제대로 조망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발견된 '온전한 자아'의 시각으로부터 상대방을 가능한 온전히 바라본다는 것은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
[온전히 정제된 자신이라는 스크린에 빛을 비추어 맺힌 타인의 실루엣을 보는 것,
단지 그것만으로는 결코 타인의 실체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외형을 제대로 보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마치 스크린에 강한 빛을 비춰 실루엣의 해상도를 올리듯..
타인과의 마찰로부터 얻어진 수많은 물음과 자신의 성찰적 탐구로부터 길어 올린 '자아'로써 타인을 온전히 관찰하는 것
미정은 바로 그러한 시선으로부터 '구자경'을 바라봤을 것이다.
아마도 '염미정'처럼 사회와 타인의 관계 속에서 온전한 자신의 좌표를 찾아보거나, 거기에 존재하는 자신의 존재방식을 아는 것, 단지 그것을 알고 이해하는 것으로도 어쩌면 어떤 '해방'의 길이 있을 것도 같다.
미정의 대사 중에는 이런 대사가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닐까요? 자기 자신을 아는 거
<'구 씨, 구자경의 해방>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상투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유는 어쩌면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금의 사회는 '창의적 사고'를 가져야 성공한다고 영혼 없이 표명하지만, 마치 사회의 기계부품처럼 창의적일 수 없는 개인의 삶은 타인과 자본의 톱니바퀴의 관성에 맞물려 겨우 한 사이클 순환되어도 결국 제자리에 서 있다.
옆자리의 타인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더 상대를 짓밟으며 위로 올라갈 수 있는가, 존재에 대한 동정심과 연민은 생존과 성공의 이름으로 거세되고, 나아가 타인은 경쟁해야할 적으로 구분되며, 배려심이 규율처럼 금기된 무한경쟁의 세상에서 열등감을 식량 삼아 누가 더 멀리 나아가는가로 사회 속의 위계는 정해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마도 '구 씨'(손석구 분)가 남들보다 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내면의 감정을 극도로 억눌러 냉정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이유였는지 그는 내면 속 감정을 스스로 삭제한 채, 오직 사냥감만을 향한 야수처럼 자신 앞에 들이닥친 임무를 향해 무지성적으로 달려드는 마치 불도저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고, 그의 삶에서 타인은 철저히 배척해야 할 그 무엇이었다.
다만 그가 가끔씩 보인 선량한 모습 속에는 사실 너무나 예민한 감정과 뛰어난 공감능력으로 인하여 그 자신이 되려 상처받지 않으려고 애써 감정을 숨기는 모습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타인이 느꼈을 감정을 의식적으로 외면함으로써, 그리고 매일 밤 세상의 모든 술을 목구멍 속으로 들이켬으로써 내면에서부터 타인을 지워내며 스스로를 보호한다.
사람이 두려워 인적 드문 산포의 작은 동네로 숨어들었으나, 우연히 염 씨 가족과 인연이 엮여 그들의 공간 속에 거처하게 되었고, 다행히도 자신에게 어떤 물음도 하지 않는 염제호(천호진)의 싱크대 사업을 도우며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던 중 제호의 막내딸 '미정'으로부터 기이한 제안을 받게 된다.
'날 추앙해요'
어쩌면 '미정'의 이런 황당무계한 제안은 오히려 구 씨에게 있어 가장 쉬운 제안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자신의 감정을 제거하며 세상을 살아가던 구 씨에겐 '추앙'이란 여느 때처럼 그저 눈앞으로 다가온 하나의 임무 같은 것이었을 테니.
단지 임무가 무엇이 되었든, 그것을 핑계로 자신의 복잡한 머릿속 잡념들을 떨쳐낼 수 있게만 된다면...
아마 그런 마음으로 수락한 '추앙'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막상 미정을 마주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과 같은 결을 가진 사람이란 걸 알게 되고, 하지만 반대로 자신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미정을 목도하게 되면서 그의 가슴속에 어떤 파문이 생겨났을 것이다.
언제나 고통을 회피하고, 외면하며 살아온 구 씨와는 달리, 미정은 자신을 옥죄오는 고통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면하며, 자신의 근본을 향한 끝없는 질문과 탐구로써 세상을 헤쳐나간다.
반면에 미정은 구 씨를 바라보면서 주변의 다른 남성들처럼 비겁하게 타인을 속이려 들지 않고, 타인보다 잘나 보이려 스스로 애쓰지 않는 모습으로부터 그의 진실됨을 발견한다.
이들에게 있어 추앙을 하고, 추앙을 받는 순간만큼은 사회의 속박에 갇힌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조건 없이 온전한 주고받음이 될 수 있었으며, 그 자체가 서로에게 진실된 상호작용으로서 '적어도 이 사람만큼은...'이라는 어떤 희망적 존재를 발견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과 같은 길을 걷는 동반자를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에 대한 안도감과, 나와 결이 같은 사람을 관찰하며 얻어낸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신뢰가 더 이상 자신이 타인에게 구속되지 않을 근거와 해방의 길을 맞이할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해방클럽'의 멤버들이 서로 그랬던 것처럼...
<해방>
우리는 언제나 타인과 함께 삶을 살아간다.
그들 존재는 마치 양날의 검과도 같아서 때로는 타인이 곁에 존재함으로써 안정감을 얻게 되거나, 어쩌면 '샤르트르'가 말했던 것처럼 "타인은 지옥"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타인이 되었든 그들과 나는 불가분 한 관계를 맺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며, 결국 나의 삶의 마지막까지 그들과 동반하게 될 것인데, 이 말은 곧 '타인이면서도 타인이 아니'라는 말이 될 수도 있을 게다.
결국 당신이 그들로부터의 해방을 원한다면, 그들과 유리된 자신이 아닌, 그들과 공존하는 자신의 여러 가지 양태 중 한 가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모든 해방 방식은.. 그 모두가 다를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하게 느껴지는 건 당신과 내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해방은 시작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존재는 결국 끝이 있다.
끝이 있음이란, 그것이 나를 남겨야 할 근거가 되거나, 어쩌면 더 나아가 나를 알려야 할 의무가 될 수도 있겠다.
알려야 할 그 내용이 무엇이 될지 지금은 확정할 수 없겠지만,
아마도 그 알림의 내용은 이렇지 않을까?
내가 오늘, 여기 살았다는 것, 그것도 당신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