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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 [음주 글, 추억]

<가끔 음주적 글쓰기는 재미있는 추억이 되기도 하지>

by 춘고

가끔 주말에 맥주를 홀짝거리며 음주상태로 글을 쓰다가 이런저런 이유(아마도 졸려서?)로 완성하지 못하고 메모장에 저장된 채로 방치된 글들이 있다.

지금 보면 거의 기억에 남지 않은 글들인데, 이 글은 아마도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는 영화를 보고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쓴 글인가 싶다. 아마도...?

지금 읽어보니 딱히 영화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글은 아니지만.. 그냥 영화 제목이 트리거가 되어서 쓰게 된 잡생각?

가끔 음주 중 글쓰기가 재미있는 것은, 평소의 나라면 쓰지 않을 스타일의 글이 써지는 것 같기도?


내용을 읽어보니 브런치의 존재도 몰랐던.., 아마도 코로나 초반에 썼던 것 같은데 그냥 두기는 좀 아까운 느낌이 들어 발행해 본다.



시간으로서의 어른

당신과 내가 가질 수 있는 것 중 가장 공평한 것 한 가지만 발설하자면, 겨우 시간이라 발음할 수 있을까?

분명 시간은 개인에게 한정된 닫힌 계(界)로서 타인에게 착복될 수 없다.


모두에게 공평한 시간의 궤적으로 관통된 상태가 어른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른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그저 시간을 지나온 사람일까? 그렇다면 시간을 지나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잠시 생각해 보면, 시간을 지나친다는 것은 일종의 "받아들여 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도 외부적 요인이라 가정했을 때 '받아들여 짐'이란 외부적 요인으로 인한'변화'의 다른 말일 수도 있겠다.


하나의 존재라는 그릇은 한정된 용량을 가진 개체로써 기존에 가진 것을 흘려보내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버려야만 어른이 될 수 있으며, 내 안의 부모라는 '절대자'를 결국에는 퇴위시켜야만 하나의 독립적 개체로서 어른이 되는 것일 게다.

시간의 비가역적으로 닫힌 계로서, 그리고 한정된 용량을 가진 존재의 순환적 흐름의 관점에서 어른이라 함은 그저 '다음을 받아들인 자'가 아닐까?



판단과 행위로써의 어른

어렸을 적 이런 생각을 종종 했었다. '어른'의 느낌이 어떨까? 어른스러움이란 무엇인가?

부모님을 보면 당연히 '부모=어른'이라는 공식이 내재되어 있었으므로, 부모/어른들은 평소 어떤 이성과 판단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라는 궁금증을 가지곤 했었다.

그 시절 어른의 판단이란 언제나 '옳은 것'이라는 무비판적 사고를 가지기도 했었는데, 아마도 유아기와 유년기를 경유하는 동안(어쩌면 청소년기까지) 부모라는 존재는 '본능적 수준'에서부터 전능한 그 어떤 영역으로 묵시되어 있었음이라.


흔히 '사회적 어른'으로 인정한다는 '스무 살'이 지났음에도 언제나 어른의 세계는 나와는 먼 이야기였다. 학원에서 알바를 하며 어른스러운 척 학생들을 가르쳐 보아도 내면에는 늘 이질감이 공생했고, 서른이 다 되면서 즐겨 듣던 '김광석'의 음악은 '어른의 사랑'을 노래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그가 안타깝게 요절했던 나이가 겨우 서른둘이라는 사실을 접했을 땐, 자신과 얼마 차이 나지 않는 간극에 잠시나마 혼란스럽기도 했었다.

어느 새부터 '어른'이라는 공허한 개념은 내가 닿을 수 없는 하나의 완전한 '이데아'가 되어있었고, 그것을 단지 짐작만 할 수 있었다.


막연히 스스로가 온전한 어른이 아닌 '어른의 이데아'적 개념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마치 시궁창 같은 이 현실과, 적절한 형태의 방법론을 갖춘 이상적인 세상을 판단하는 것이 어렵다.


예컨대 보통은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건의 서사를 둘 이상으로 쪼개어 관망하게 되는데..

가령 사건의 비판 방식을 비 어른스럽지만 현실적으로는 적절했는가, 아니면 내 안에 내재된 '어른의 이데아'에 입각했을 때 판단에 의한 행위가 어른스럽지 못했을 뿐인가?

이런 형태의 판단 방식은 세월이 더 흘렀음에도 여전히 내 안에서 수렴되고 있다. 이를테면


1. 마스크가 고귀한 작금의 '코로나19'의 현실에서 우리나라가 중국에 마스크를 지원하는 것이 옳았던가?(정부차원에서 지원했던 것은 아니라는 기사는 보긴 했지만 어쨌든..)

2. 중국인들의 입국 금지는 옳은 판단인가?

3. 내국민 조차도 챙기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국내 체류 중인 외국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적절한가?

4. 현 사태의 원흉적 우상이 되어버린 '신천지' 집단에게 치료 이상의 돈을 들여, 평범한 국민적 복지까지 하는 것은 어떠한가?


이와 관련된 대한민국을 뒤덮은 뉴스 기사와 댓글들을 볼 때, 현 정부의 대처방식이 미봉책적이라며 원색적 비판을 쏟아내는 사람들의 판단적 메커니즘은 과연 어떤 인과율에 근거를 두는 것인가?

그런 인과율로 도출된 발언과 행동은 적절한 형태로 이루어진 사고의 산물인가?


중국에 마스크가 지원되었던 시점은 분명 신천지 발 코로나 확산이 터지기 전이었다, 이럴 때 보통 우리가 어릴 적부터 학교와 어른들에게 수없이 배워온 도덕적 판단과 관용적 가르침에 입각한다면 어떤 태도가 어른스러운 행동인가?

만약 관용적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정했다면, 그 선택으로 인한 피해를 받는 사람을 감수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가?

말로써 판단과 비판은 쉽지만, 국가가 가져야 할 태도와, 개인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에는 분명 차이가 있기 때문에, 쉽사리 정의를 내리기엔 내 안의 도그마에 빠질 우려가 크다.


그럼에도 개인이 가져야 할 태도로써 '어른스러움'은 무엇 일지에 몇 가지 드는 생각은...

만약 내가 타국에 있을 때 천재지변이 발생하였다면 어떨까? 당연하겠지만 타국민으로서 보호받을 권리는, 자국민보다는 우선 될 수는 없을 것에는 많은 이들이 동의할 듯하다.

아마도 그런 현실은 타국민 스스로가 먼저 인지하지 않을까?


하지만 실재적 현상으로 드러나는 현실은, 미시적으로 자국민과 타국민을 명확하게 구별하여 지원하는 것이 어려운 현실 속에서 터져 나오는 불만이 '민족적 배타성'으로 발현되는 것일 테지.


단지 의아한 점은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자국민이 타국민에 대한 감정적 배타성을 넘어 폭력성마저 드러내는 경향이 보인다는 것이다.


과거 역사로부터 되짚어 보면, 국가의 위기로부터 힘을 부여받는 몇 가지 사상이 있었다.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단연 '파시즘'이다.

강자로부터 분리된 약자, 나아가 인류 스스로가 미분되어 등급을 매기면서, 당연히 도태되는 것은 '약자'쪽이 일 것이고, 그와 동시에 '현실의 위기 타파'라는 외침으로부터 시작되는 테제는, 국가와 집단의 이름 아래 재구성된 이데올로기적 단체를 창단하고, 마초이즘이 박력을 되찾으며, 사회를 지배하는 현상.


분명 현 사태는 당시 2차 대전을 코 앞에 두었던 독일 같지는 않지만, 드러나는 경향성이 적지 않게 파시즘과 유사한 조짐이 보인다.


유태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에 대해서 새삼 생각하게 되는데, 현재 각종 뉴스 기사와 달린 댓글의 원색적 분노는 아마도 가정과 국가의 안전함을 지키고자 했던 마음으로부터 효시가 되었을 터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란 말이 무색하게도 인터넷에서는 어렵지 않게 극단적인 성향의 비판과, 혐오성 댓글들을 찾을 수 있다. 어째서 저렇게까지 폭력적이어야 하는가? 언제부터 인터넷의 원색적 분노와 내쏟는 고함은 우리 안에서 평범함이 되었던가?


인간이라면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소급하여 발전할 수 있는 기록의 동물 아니었던가?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처럼 동태 복수적인 마음가짐과 그 들끓는 분노... 과연 그 끝엔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과연 이러한 방법론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비추어 볼 때 과연 어른스러운 방식이라 할 수 있을까?


현 코로나 사태 외에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이버 세상 속의 수많은 혐오와 분노에는 일본에 대한 저주도 빠지질 않는다.

분명 나조차도 같은 한국인으로서 이해하지 못할 부분은 아니나, 그런 형태의 저주와 분노는 과연 어른스러운 것일까?

또 한 가지 여기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오류는 작년 여름부터 이어 온 일본에 대한 국민적 불매운동과 동시에 고취된 애국심은 현재의 사태와 더불어 어떻게 내 안으로 환원시켜 볼 수 있는가?

일본의 정당치 못한 외교방식에 대항하여, 대한민국이라는 자국을 생각하던 수 많던 부류는 지금, 왜 같은 국민인 자신의 이웃을 배려하거나 돌아보지 않고, 매점매석을 저지르거나, 앞다투어 한 개인이 다량의 마스크를 사재기하고자 달려드는 현 상황은, 앞서 일본의 불매운동으로 하나 된 애국적 현상과 어떻게 합치하여 내 안에 수렴해 볼 수 있을지 요원하다.


아무래도 직접 코 앞에 닥친 위협으로부터 자신과 가족들의 안위를 두고 있는 상황을, 단지 이성적 어른스러움만(=이데아적 어른)으로 판단해보고자 했던 나의 내면적 미숙함이 쓸데없이 글만 너무 장황하게 써 내려가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다만 개인을 넘어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한 현실적 '어른스러움'이라는 것은 어떤 형태일지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썼던 글이, 고작 나의 작은 시각에서 보이는 단순한 통시성만으로 쓰인 이 글 자체가 경거망동함이 된다는 것만은 알게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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