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타인과의 대화는 언제나 쉽지 않다(나의 경우). 물론 대화 상대와 내가 비슷한 성향일 경우엔 별다른 노력 없이 대화가 물처럼 흘렀던 적도 있으나, 나의 소소한 경험적인 확률 상 그런 행운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주로 만나는 인물 몇을 제외하고는 일상적인 사회생활에서는 보통 대화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어느 정도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했던 경우가 더 많았다.
경험적으로 대화가 수월했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언제나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선행하여 주제나 질문들을 던져주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따금은 성향에 관계없이 천성적으로 대화를 좋아하고 능숙한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은 특별히 공감 능력 여부와 관계없이 분위기를 주도해 주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대화도 수월했다.
반대로 대화하기 어려운 성향을 가진 부류도 여럿 있겠으나, 최근 몇년 간 유난히 대화가 어렵다고 느껴지는 부류는 '자기 완결성'을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과거부터 주변에 그런 부류는 많이 존재했으나, 한 번 인식되고 나니 이후부터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게 된 듯하다.
아마도 인식되기 시작한 주된 이유는 현재 일하는 직장의 A 씨와의 대화가 주요했지 싶다.
A 씨와 대화를 할 때, 어느 시점이 지나면 대화가 맥없이 끊어지는 경우가 일정하게 반복된다.
물론 초반에는 인식하지 못했다가 어느 순간부터 무엇인가 이상이 있음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이런저런 이유를 분석해보니, 그와의 대화는 대부분 이렇게 끝나더라.
원래 그런 거지 뭐...
저 말이 나오면 나로서는 이후로 할 말이 없게 된다. 그의 '달관력'이 어느 정도 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구사하는 대화의 '종결 법'에는 이 날까지 세상을 살아보니까 패턴적으로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달관했으니, 결국 이번에도 이치와 흐름을 보아 그럴 것이라는 판단이 내렸기 때문일 것이리라.
하지만 그와 대화하는 나로서는 <원래 그런 거지...>라는 말이 나왔다면, 이제 대화는 종결해야 한다. 이미 그에게서 '자기 완결'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소고해보면 살면서 습관에 가깝게 이런 대화 방식을 구사하는 사람들을 많이 지나쳐 왔다.
군대의 선임, 학교와 직장에서 선배와 상사들, 위로 나이 차가 적음에서부터 많음까지...
그들만의 인식론적 태도에서 비롯된 "원래 그렇다던.." 세상이 그러한 상태로 놓여 있다는 것은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알고, 나 역시 알고 있다.
하지만 가능한 원래 그렇다는 식으로 규정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이유는, 그런 대화 자체가 참으로 나아감 없이 순환참조적인 권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불현듯 후기 인상주의 화가였던 '폴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 작품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지나친 세월 속 근본에의 질문은 왜 필요할까?
수많은 부류의 대가들이 과거(근본)에 침잠했던 건, 과거로부터 발굴한 현재의 존립적 가치를 미래로 환원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원래 그랬던 것'이라고 발음함으로써 현실과 타협하고, 더 이상의 물음 없이 현재에서 사고를 종결짓는다. 왜 그런 것이었는지의 질문은 가치성이 없다. 어차피 그래 봤자 먹고사는 문제 이하일 테니까.
그런 이들이 참으로 유장하게 내린 원래부터 그러한 '종결'로부터 많은 존재들이 사소해지고, 시나브로 하찮아진다. 소위 3D 업종을 비롯하여 만화나 게임, 철학, 정치에 이르기까지... 그런 것은 '원래 그런 사람들이나 하는(보는) 거니까...'
그러한 스켑티시즘에서 환원된 결론은 결국, 디스토피아다.
선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여전히 보수를 지지하시는 어른들은 또다시 '원래 그래 왔던 것'이라는 수식이 붙었으며, 제왕적 남성은 원래 그래 왔던 것으로서 세상은 양분되었다.
물론 각자 나름의 철학을 바탕으로 자기 완결성을 가지며 세상을 구분 짓는 것은, 미시적인 일상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인류적 특성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을 인정하기는 나로서는 쉽지 않다.
예컨대 '토마스 쿤'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말해지는 <패러다임>의 개념이 생각난다.
'패러다임'은 양립하지 않으며, 공약 불가능한 특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패러다임의 전환기에는 같은 시대에 존재한 과학자 집단 마저도, 새로운 패러다임 이전의 과학자 집단과, 새로운 패러다임의 과학자 집단의 세계관은 다르다고 서술한다.
왜냐하면 원래 그러던 세계였으니까...
하지면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상과학에서의 꾸준한 연구와 끈질긴 물음에서부터의 바탕이 있었기 때문에 '패러다임의 전환'이 발생할 수 있듯, 비단 과학적 분야만의 적용사례가 아닌 현재의 많은 회의적인 사람들의 '자기 완결적 태도'에서 벗어나, 안티테제적인 사고의 압력을 요하는 바, 나아가 '왜?'라는 물음의 중요함을 느낄 수 있다면, 지성적 풍요로움과 다채로운 사고력의 바탕이 되어줄 추동력이 될 것으로 생각해본다.
그리고 대화의 즐거움은 덤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