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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언어'라는 것은? [생각]

<위정자의 사적 언어란...>

by 춘고

언어에 관련하여 나라가 혼란스럽다.

지체 높으신 위정자의 사적 언어가 문제되고 있는 시간을 지나고 있는데, 소위 그의 '사적 언어'는 인간이라는 이유로 그저 모든 개인이 흔히 할 수도 있는 그런 것으로 보아야 할까?

한 개인이 평소 언어를 어떻게 구사하는지만 보아도 그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언어라는 것은 일종의 ‘이성의 지평선’ 같은 것이어서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이성적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가늠해주는 중요한 척도일 것이다.



지금처럼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때에도, 종종 언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목구멍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공기의 파장, 어떤 지면에 눌러 쓰인 잉크 자국…

이런 것들이 대체 무엇이길래 나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주고, 나는 어째서 이것을 해석할 수 있는가.

가끔 영화처럼 빨간약을 먹고 깨어나듯이 세상 모든 것을 생소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허공을 떠다니는 공기의 파장과 면(面)에 쓰인 다양한 표기들에 둘러싸여 부유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이렇게 매일 우리는 ‘언어’라는 거대한 체계 속에 살아가고 있으며, 세상의 수많은 언어들 중에서 사회적으로 약속된 몇 가지의 언어로써 타인과 소통한다.


이다지도 모두에게 익숙한 언어지만 사용하는 사람의 방식에 따라 한 개인, 넓게는 한 국가 전체의 문화적 깊이를 가늠할 수도 있는데, 다양한 언어체계가 발달된 국가(사회)일 수록 그 국가가 얼마나 유구한 역사를 가졌었는지 유추할 수도 있다.


마른걸레에서 물을 쥐어짜듯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지식을 짜내어 몇 가지 예를 들면…

동양의 선조들은 건축물의 등급을 ‘전당합각제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 이렇게 여덟 가지 단계로 언어를 나누어 사용하였는데 궁이나 절에서 사용하는 근정전, 대웅전 등 ‘전(殿)’급의 건축물부터 성춘향과 이몽룡이 헤어진 ‘정(亭)’급의 건축물인 오리정까지 각각의 장소와 쓰임에 맞게 언어를 분류하였고, 여기에서부터 다시 지위를 나타내는 체계로 왕을 가리키는 ‘전하(殿下)’, 황제를 가리키는 ‘폐하(陛下)’의 경칭이 파생되었다.

‘전하’는 ‘전’ 등급의 건축물 아래 사는 인물이었던 즉 ‘왕’을 나타내었고, 폐하의 경우는 조금 특별한데,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제후국들로 분산된 군웅할거 시대를 하나로 통일한 진나라의 ‘시황제’가 기존 제후들이 사용했던 호칭인 ‘전하’와 같은 등급의 호칭을 사용할 수 없으므로 폐하는 ‘궁궐의 계단 아래’ 즉 신하들이 위치하는 곳을 뜻하는데, 즉 직접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계단 아래의 신하들이 황제를 향해 호소함을 나타내는 방식으로써 ‘폐하’의 경칭을 사용하였다.

때문에 황제와 왕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단어 역시 다르게 되는데, 스스로를 겸손히 낮춰 부르는 단어로 황제는 자신을 ‘짐(朕)’이라 하였고, 왕은 자신을 과인(寡人)’으로 칭하는 장면을 TV에서 자주 듣기도 했다.

(사실 이러한 이유로 '각하'는 의외로 상당히 낮은 표현이다.)


또한 일반인들은 위험을 피하는 행위를 ‘피난’이라 하지만 임금의 경우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표현인 ‘몽진(蒙塵)’이나, 임금이 자리를 피한다는 뜻의 ‘파천(播遷)’이라는 단어 역시 상황과 때에 맞게 사용하도록 다양하게 언어가 체계화되어 있다.



결국은 같은 뜻임에도 이토록 상황과 장소에 따라 다양한 언어가 존재함이 나타내는 사실은 그만큼 그 나라의 역사가 다양한 체계/문화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게 하고, 체계/문화가 다양하다는 것은 어떤 구획/구분 지어짐이 많다는 것인데..

서로 다르다는 사실과 다름을 구분 짓는 것, 즉 주체와 객체가 나누어진 ‘다름’이라는 것은 중요한 하나의 명제를 파생시킨다.


‘어떻게 다를 것인가’


문화가 발전되었다 함은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다양함’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또 다른 문화적 성취를 도모하게 되는데, 다르다면 어떻게 다를 것인가의 고민을 낳는다.

예컨대 미학적인 측면에서 복식문화를 말해보면 흔히 ‘패션’이라 일컬어지는 이 문화는 타인과 내가 달라야 하는 것에 근저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그냥 다를 것인가? 아니면 미학적으로 더욱 아름답게 다를 것인가?

역사적으로 우리는 미학을 문화적 발전 단계에서 앞선 단계로 보았다. 같은 그림을 보더라도 감정적으로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더 뛰어난 것으로 취급되었고, 복식에서도 더욱 유려한 복장이 높은 단계/높은 지위를 가진 자가 차지하고는 했다.


현대에서도 여전히 패션이라는 개념은 타인과 다르게 입는 것, 그리고 아름답게 입는 것에 방향성을 두는데 아름답다는 개념은 언제나 비교대상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서...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에 어떤 하나의 물체를 두고 아름답다고 규정지을 수는 없다.

이 물체가 어째서 아름다운지를 규정짓기 위해서는 다른 것과 비교를 했을 때 외형적/질적 차이에서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적 차이가 파생되는 것일 게다.


멀리 돌아왔는데.. 다시 언어로 돌아가면 즉 다양하다는 것, 다양한 언어를 가진다는 것은 문화의 발전과 깊은 연관성이 있고, 우리가 단지 소통의 수단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것 이상으로 세상을 제대로 짚어보기 위해서는 다양한 언어, 다양한 단어들을 알고 사용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의 3요소로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를 제시했는데, 이 역시 언어를 세분화하는 것이며 그중 ‘로고스(이성)’는 그리스 철학에서 ‘언어’ 그 자체로 보았다.


언어(말)이라는 것은 뜻을 담지할 수 있는 그릇 같은 것이기 때문에, 언어는 지식/지혜를 구성하는 요소이고 우리가 말을 잘한다는 것,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지능이나 생각 그 자체를 발전시키는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모르는 것에 대한 상상, 또는 존재하는 것에 대한 규정을 언어로써 하게 된다.

가령 우리가 배고픔을 느끼는 것도 언어로써 ‘배고픔’이라는 단어가 규정되어 있지 않다면 개인마다 신체적으로 어떤 감각적인 느낌은 가지고 있겠지만 그것이 배고픔 일지, 아니면 뱃속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인지 포착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배고픔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짐으로써 신체의 감각적인 느낌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게 되고, 타인들과 소통해나가며 그것이 지식이 되고, 지식은 후손에 전달되면서 다양한 발전과 활용이 가능해진다.

이해를 돕는 또 다른 예로 ‘얼큰함’이 있을 텐데,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닌 갑작스럽게 외국인이 저 단어를 들었을 경우 그 단어가 말하는 감각적인 느낌을 포착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언어는 단순한 뜻을 지니는 차원을 넘어, 지식이나 지혜를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한 개인이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철학적 지평이 얼마나 넓어지는가, 하나의 사물을 바라볼 때에도 그 사물 너머를 얼마나 변증적으로 볼 수 있게 해 주는가의 능력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린아이의 명석함을 판단할 때, 아이가 나이에 비해 구사하는 언어를 보게 된다. 또한 누군가에게 지적이다, 똑똑하다는 표현을 할 경우에도 그 사람이 언어를 구사하는 방식을 보고 판단한다. 언젠가 보았던 TV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금기하는 게 몇 가지 있는데, 그중에 감정을 뭉뚱그리는 언어로 ‘짜증’이라는 단어를 금한다고 했다.

‘짜증’이라는 단어는 많은 감정을 뭉개는 효과가 있어서 배가 고파도 짜증 나, 어려워도 짜증 나, 답답해도 짜증 나, 잠이 와도 짜증 나... 너무 많은 감정들이 ‘짜증’이라는 단 한 개의 단어로 뭉개진다는 것이었다.


마치 고스트 버스터즈에 나오는 먹보 귀신처럼 많은 언어를 먹어치우는 단어로는 짜증, 대박, 거시기, 각종 대명사 등이 있는데, 수많은 상황들을 한 개의 단어가 대체해버리는 통칭적인 단어의 사용은 많은 생각을 감속시키고, 논리를 저하한다.



또한 이렇게 글을 쓰다 보면 언어의 미학적인 것도 생각해보기 마련이다.

글을 쓸 때 굳이 자주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찾아 쓰는 이유는 특정 상황에 맞는 단어를 최대한 골라서 쓰는 행위로부터 어떤 미학적 감성을 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평론 글이 비판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유는 어려운 단어를 씀으로써 자랑질 같은 것을 하는 거 아니냐..라는 식의 비판을 일편의 사람들이 했던 것으로 잠시 떠들썩했었던 기억이 난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기억에 그가 영화 ‘기생충’을 보고 평론했던 글이었는데...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 낸 신랄하면서도 처연한 계급 우화"

개인적인 감상일 수 도 있겠지만, 이 얼마나 함축적이며 미적인 표현인가?


발음적으로, 해석적으로 조금 더 명확하고 적절한 표현을 찾아 쓰는 것으로 문장의 완성도를 올리는 행위가 즐거운 이유는 언어에서도 충분히 미학을 탐미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토록 언어라는 것은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문화, 지성, 감수성을 보여주고 나아가서는 국가의 역사성을 반영한다.

그리고 언어는 무의식의 영역에서부터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며, 또한 언어는 이미지와 결합되면서 인간의 이성 그 자체에 복합적이고 절대적으로 영향을 가지는 중대한 요소임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의 대통령께서 말씀하시는 언어는 어디에 닿아 있는가?

임기기간 동안 매일 홍문지연의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는.. 그 중에서도 공식적으로도 최상위급의 막중한 자리임에도 사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라는 것은 어쩌면 그가 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보다 더욱 진실에 가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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